수묵 한국화가 김호석 화백 ‘먼동’ 전 3월4일까지 한경갤러리 “일상에서 만나는 해학과 은유의 미학”

입력 2016-02-21 22:30
수묵화를 대표하는 한국화가 김호석 화백(59)의 그림은 일상생활을 바탕으로 한다. ‘배추’를 보자. 썩어 문드러지는 배추 속에 새싹이 돋고 있다. 얼마나 생명력 있는 그림인가. ‘파리채’ 위에 파리가 앉아 있다. 파리를 잡으려면 파리채를 들어야 하는데 그러면 파리는 날아가 버리고 말 것이다. 이것 또한 삶의 아이러니를 역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땅에 떨어진 감, 바지를 벗고 오줌을 누는 아이, 곡식이 들어있는 뒤웅박, 썩어서 버린 무에서 피어나는 꽃 등이 재미있다. 세상에 대한 여유로운 시선과 해학적인 사고가 아니고서는 이토록 달관의 경지에 오르기란 쉽지 않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할아버지에게 다섯 살 무렵 서예와 사군자를 배운 실력이 밑바탕 됐음은 물론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묵향의 세계에 빠져 수묵 인물화 작업에 매달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초상화를 비롯해 성철과 법정 스님, 김수환 추기경, 단종, 정약용, 김구, 안창호, 신채호, 한용운의 영정을 그렸다. 1999년에는 전통 수묵화를 현대적으로 계승한 것으로 국립현대미술관 최연소 ‘올해의 작가’에 선정되기도 했다. 초·중·고 미술 교과서에 그의 작품 28점이 실려 있다.

김 화백의 개인전이 2월 15일부터 3월 4일까지 서울 중구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 1층 한경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먼동(東): 날이 밝아올 무렵의 동쪽)’을 주제로 사실주의 화풍의 인물화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붓질한 작품 20여점을 내놓았다. “이제는 어둠이 걷히면서 빛이 새어 나오는 먼 동쪽 하늘을 보며 서로를 다독이며 살아야 한다”는 취지다.

“먼동이 튼다. 어두움도 아니고 밝음도 아닌, 어두움 속에서 어두움을 보는 것, 그것은 알 수 없는 세계이자 알고 싶은 세계이다. 알 수 없는 세계에는 알고자 하는 무의식적 마음이 있다. 어두움 쪽에 있는 어두움의 숭고함을 느끼게 하고 싶다. 나는 사람의 뒷모습을 좋아한다. 뒷모습에는 연민과 그리움이 있다. 그리고 그늘이 있다.”(작가 노트 중에서)

섬진강 근처에서 직접 만든 전통한지로 작업하는 작가는 현대인의 숨 막힐 듯한 일상을 동쪽에서 떠오른 일출처럼 그림으로 형상화했다. 그는 마음이 마음의 대상이 되고 정신이 정신의 대상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것이 거꾸로 자신을 풍자하는 것, 역풍자에는 해학과 은유가 가득하다. 텅 빈 화면의 여백은 사유와 명상을 제공한다.

김 화백의 작품들은 삶의 근본에 대해 성찰하게 하면서 자신을 스스로 되돌아보게 한다. 고양이가 풍경(風磬)을 쳐다보는 모습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한 ‘관음’은 인문학적 회화의 대표작이다. “저 놈 봐라, 저놈 좀 봐라, 저 물고기를 잡아먹어 보았으면…”하는 마음이다. 고양이의 팽팽한 긴장감과 풍경의 이미지를 조합한 이 작품은 풍자의 미학을 들여다보게 한다.

김 화백은 “인물화는 한 인간의 삶과 스토리를 보여주는 작업”이라고 여긴다. 얼굴 없는 스님의 초상화에 ‘광불’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소탈하고 인간적인 스님의 내면이 담겨 있는 초상화로 이목구비를 지워낸 여백에 관람객들로 하여금 각자 인품과 성품을 채워 넣게 하려는 시도다. 상반신의 형체만 그린 ‘앞 뒤’, 애절한 그리움으로 소치 허련의 작품을 복원한 ‘초의 선사’도 마찬가지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어머니를 기다리는 모습을 그린 ‘엄마가 돌아오기 전까지 새벽은 오지 않는다’가 가슴 아리다. 그림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등을 보고 저쪽 하늘과 안락함과 멀리 보이는 무량의 세계를 상상한다. 그 반대편에도 무언가가 있다”는 그의 말대로 갑갑한 일상에서 가끔은 희망의 출구를 찾아볼 일이다. 이에 맞춰 ‘모든 벽은 문이다’를 출간했다(02-360-4232).

이광형 문화전문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