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택 "연극의 본령으로 돌아가기 위해 게릴라로 다시 싸우겠다"

입력 2016-02-12 22:40

“시대와 인간에 대한 담론을 제시하는 연극의 본령으로 돌아가기 위해 싸우겠다. 천박한 세속화 사회에서 유격적인 감수성을 갖춘 진정한 게릴라가 되어 다시 시작하겠다.”

극작가 겸 연출가 이윤택(64)이 12일 서울 대학로 게릴라극장에서 극단 연희단거리패 30주년 기자간담회를 열고 연극이 세속화된 한국 사회를 정면 비판하는 한편 초심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는 “한국 연극이 정치에 예속되고, 그 허파인 소극장 연극이 사라지고 있다. 현재 우리 극단은 물론 한국 연극계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면서 “20세기라면 비장하게 싸우겠지만, 21세기에는 비장하게 싸울 상대가 없다. 개판의 시대에는 깽판으로 맞서야 한다. 그게 바로 ‘블랙 유머’다”고 선언했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 지지 발언을 한 그는 지난해 연극계 최대 이슈였던 정치적 외압과 예술 검열 논란의 당사자다. 이와 관련해 말을 아껴왔던 그는 이날 작심한 듯 한국 연극계의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쏟아냈다.

그는 “오늘날 한국 연극은 연극답지 못하다”고 강하게 질타하면서 그 원인으로 좌우 이데올로기의 굴레, 담론이 사라지고 잡설만 무성한 대중제일주의, 공공지원에 지나치게 의존적인 연극계의 행태 등을 꼽았다. 그는 “21세기 연극은 좌우 이데올로기와 지역감정 등 낡은 이분법적 세계를 넘어서야 한다. 또한 한국 연극의 특징이었던, 세상과 인간에 대한 담론을 다시 한번 제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동안 순수예술이 너무 공공지원에 의존해 말랑말랑하게 살아 왔다. 경제적 독립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가난한 연극’으로 돌아가야 한다”면서 “김수영의 시처럼 결국 적은 나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나 자신 역시 너무 쉽게 세상과 만나지 않았었나 반성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그는 예술계 거장들을 홀대하는 현실에 울분을 터뜨리는 한편 미적 형식도 없이 ‘융복합’이라는 이름 아래 만들어지는 콘텐츠 제작 붐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난을 던졌다. 그는 “오태석, 이강백 등 거장들의 작품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사업에서 줄줄이 떨어졌다. 심지어 극단 목화는 지난해 30주년을 맞아 한국공연예술센터 대관조차 받지 못했다. 그리고 1970년대 전위 연극을 이끈 기국서는 요즘 생계 유지를 위해 아주 비천한 노동을 하고 있다. 이게 제대로 된 사회인가. 한국 사회는 너무 야만적이다. 그에 비해 융복합 등 각종 콘텐츠에는 돈을 쏟아붓고 있던데, 거대한 쓰레기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고 비판했다.

참단한 현실을 뼈저리게 실감한 그는 “이제 제대로 싸워보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개판의 시대에 깽판으로 맞서겠다. 소극장에서 대단히 재미있고 화끈하고 불편한 연극으로 저항하겠다”고 밝혔다. 그가 이야기하는 깽판은 올해 30주년 기념 공연 시리즈에서 젊은 연극인들은 ‘마구잡이로 거칠게’, 자신은 ‘세련되게’ 작품을 올리는 것이다.

그는 또 올해 30주년 기념 공연 시리즈에 배우 유인촌과 명계남을 세우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두 배우는 지지 정당이 다르긴 하지만 정치에 참여했다가 과거의 명예를 되찾지 못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는 “정치적 멍에 때문에 배우로서 재능이 제한되는 불상사를 이제는 씻어내야 한다. 그것이 30주년 연희단거리패의 책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연희단거리패는 60여명의 단원들이 공동생활과 작업을 하는 연극공동체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연극 집단이다. 과거 연극공동체를 추구하던 해외 극단들도 대부분 이상으로 끝났지만 연희단거리패는 아직까지 굳건히 유지되고 있다.

이윤택은 “많은 사람들이 연극공동체는 불가능한 이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 극단은 뭉쳤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남았다고 생각한다”면서 “우리 극단은 예술보다 삶을 우선시한다. 그리고 재능보다는 인간적인 신뢰를 중시한다. 이게 바로 연희단거리패의 힘이다”고 피력했다. 이어 “우리 극단에서 예술로서 연극이 차지하는 비중은 30%다. 나머지 70%는 먹고 살기 위해 일한다. 예를 들어 최근 진명여고 110주년 기념 행사를 맡아 치르는 것도 우리 극단이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 가운데 하나다”고 덧붙였다.

재정적인 투명성은 극단을 건강하게 유지시켜주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이윤택을 비롯해 단원들은 극단 수입에 따라 월급을 받는다. 이윤택의 월급은 한달에 200만원으로 정해져 있지만 외부 작업을 할 때는 받지 않는다. 단원들의 경우 외부 작업을 할 때는 수입의 20%를 극단에 낸다.

이날 기자간담회에 동석한 현재 극단 대표인 김소희를 비롯해 배우 김미숙과 이승헌, 조명디자이너 조인곤은 “이윤택 선생님을 만나 연극을 통해 의미있는 삶을 추구하면서 지금까지 달려왔다. 극단을 떠나지 않고 버티는는 것은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존심을 지키며 당당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며 “개인주의적인 삶에 익숙한 요즘 사회에서 오히려 서로 구속하길 원하는 사람이 100명은 되지 않겠나? 풍요롭지는 않지만 같이 먹고 살기 때문에 생각보다 힘들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이어 “이윤택 선생님이 계시지 않아도 우리는 극단과 함께 영원히 앞으로 나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연희단거리패의 30주년 기념공연은 ‘방바닥 긁는 남자’(2월 21~28일)를 시작으로 ‘벚꽃동산’(4월 22일~5월15일), ‘오이디푸스’(8월), ‘햄릿’(9월), ‘꽃을 바치는 시간’(11월), ‘엔드 게임’(12월) 등 극단의 대표작과 신작 등 6편이 준비됐다. 이와 함께 게릴라극장의 젊은 연출가전에 황선택, 오세혁, 차현석, 오동식, 김지훈, 이채경이 나선다. 또 기획전으로 올해 극단 창단 40주년을 맞는 76단의 기국서와 극단 골목길의 박근형이 손잡은 ‘76단+골목길’(5월)과 극작가 윤대성의 신작 ‘첫사랑이 돌아온다’(7월)도 주목된다. 연희단거리패는 9월 성균관대 근처에 ‘연희단거리패 삼공스튜디오’를 열어 대표 레퍼토리를 금·토·일요일 상설공연하고, 나머지 기간엔 젊은 연출가들의 워크숍 장소로 제공할 계획이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