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석권하며 여자 태권도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임수정(29) 등 스포츠 메달리스트들이 5일 경찰 배지를 달고 전국 치안 현장으로 나간다.
경찰청은 이날 오후 충북 충주 중앙경찰학교에서 무도 특채자 50명 등 286기 특채경찰 311명의 순경 임용식을 거행한다고 4일 밝혔다. 이들은 1년간 지구대에서 근무한 뒤 각자 전문 분야별로 전담부서에 배치된다. 무도 특채자는 5년간 강력계 형사로 일하게 된다.
‘태권여제’부터 여자 유도 간판스타까지
경북 경산에서 현장 경험을 시작하는 임수정은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을 시작으로 2008년 베이징올림픽, 2009년 덴마크 세계선수권대회 등에서 모두 정상에 오른 ‘태권여제’다.
이번 순경 임용자 중에는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태권도와 유도에서 각각 금메달을 딴 허준녕(29)과 황희태(39)도 있다. 지원 당시 허준녕은 경기 김포시청 소속 선수, 황희태는 유도 여자 국가대표팀 코치였다. 이들은 각각 서울과 충남 천안에서 지구대 생활을 한다.
한국 여자 유도 중량급 ‘간판스타’ 정경미(31)도 이들과 무도 특채 동기다. 정경미는 2010년 광저우, 2014년 인천에서 각각 열린 아시안게임 여자 78㎏급에서 잇달아 금메달을 획득했다. 아시안게임 2연패는 한국 여자 선수로 첫 기록이었다.
또 하나의 무도 특채 종목인 검도에서는 2006년 세계선수권대회 단체우승을 한 김완수(36)가 순경 계급장을 달고 광주로 간다. 올해 무도 특채 순경 임용자는 태권도 25명, 유도 15명, 검도 10명이다. 3개 종목만 뽑는다고 ‘종목 차별’ 논란까지 벌어졌던 것을 보면 경찰이 되고 싶어 하는 운동선수가 각 종목에 분포해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태권여제’는 왜 경찰이 됐나
정상에 오른 선수들이 경찰에서 가장 낮은 계급인 순경으로 자원하는 이유는 뭘까. 2004년 이후 11년 만에 실시한 지난해 경찰 무도특채는 올림픽 등 국제대회 메달리스트나 국내 전국대회 대학부 이상 개인 우승자만 지원할 수 있게 했는데도 경쟁률이 9.8대 1이었다. 지원자 492명 중 45명이 국제대회 메달리스트였다.
2013년 10월 94회 전국체육대회를 마지막으로 은퇴한 임수정은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경희대 체육대학원에서 석사 논문을 쓰고 있었다. 계속 공부해서 박사 학위까지 딸 참이었는데 무도 특채 공고가 발길을 멈추게 했다고 한다.
임수정은 4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태권도를 같이 한 선배 언니들 중에 먼저 경찰이 된 사람이 여러 명 있는데 그들에게서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많이 느껴졌었다. 그런 직업이 좋은 직업이라 생각했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마침 무도 특채가 나와 지원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약자 등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는 자체가 굉장히 큰 의미로 다가왔다”고 덧붙였다.
황희태는 중학교 시절의 유도 코치가 앞서 경찰 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서 진작부터 경찰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2004년 무도 특채가 떴을 때는 국제대회에서 딴 메달이 없어 지원할 수 없었다. 메달을 따고는 무도 특채가 나오지 않아 일반 순경 공채를 준비했던 적도 있다.
1998년 무도 특채로 경찰이 된 은사는 지금도 현직에 있다. 강력계 형사인 그가 범죄자를 잡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고 황희태는 말했다. 그는 “조폭들을 잡아 사회정의를 실현한다는 그런 느낌이 있었고 직접 범죄자를 잡아 싶었다. 그런데 이런 기회가 생겨 뒤도 안 돌아보고 지원하게 됐다”고 했다.
여자 국가대표팀 코치였던 황희태가 지난해 6월 무도 특채에 합격했을 때 선수들은 “가더라도 (2016년 8월 브라질) 올림픽 끝나고 가면 안 되느냐”며 말렸다.
금메달리스트, 겉은 화려하지만
각 종목 최고 선수들이 경찰에 대거 지원한다는 사실은 경찰의 위상이 크게 높아졌음을 방증하기도 한다. 급여 등 처우가 개선됐고 계급별 승진 가능 연한도 줄었다. 순경과 경장은 각각 1년 뒤 진급 시험을 볼 수 있다. 빠르면 2년 만에 일선 실무진 중 가장 고참급인 경사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경찰청 인재선발계 관계자는 “이런 것들이 메리트(장점)가 있어서 지원자가 몰리는 게 아닌가 한다”고 분석했다. 운동선수 경력은 호봉으로 인정해주기 때문에 같은 순경으로 출발하더라도 일반 공채 출신보다 급여가 높다는 이점이 있다.
운동선수들은 안정된 직업으로서 경찰을 찾는 경향도 강하다. 선수나 코치는 대부분 계약직으로 지위가 불안정하다. 국제대회 메달리스트는 매달 연금이 나오지만 이 금액은 최대 100만원을 초과하지 않는다. 메달을 여러 번 따도 100만원까지만 나온다. 이 때문에 꾸준히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하는데 운동선수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필드에서 물러나게 된다. 자연히 다른 일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선수들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직업이 공무원이면서 강한 체력을 필요로 하는 ‘경찰’이다.
허준녕은 “국가대표를 했다고 해서 꼭 교수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코치나 감독도 대체로 계약직이라 안정적인 게 별로 없다”고 전했다. 그는 한국태권도협회 홈페이지에 뜬 무도 특채 공고를 보고 처음으로 경찰이라는 직업을 생각하게 된 경우다. 허준녕은 “알아보니 여건이 너무 좋았다. 안정적이라는 점에 메리트가 있었고, 제 특기를 잘 살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지원 이유를 설명했다. 무도 특채에 합격했을 땐 누구보다도 부모가 좋아했다고 한다.
전문직 ‘초과 공급’ 시대
경찰에 몰리는 건 운동선수만이 아니다. 모든 특채가 높은 경쟁률을 보이고 있다. 그만큼 최종 합격자의 경력도 화려하다. 올해까지 채용한 교통공학 특채 경찰관 100명 중 46명이 석사 학위 소지자다. 올해는 박사 학위 소지자 2명이 들어왔다. 이들 역시 순경이다.
마찬가지로 현재 순경인 외사 특채 계급은 처음에는 초급 간부인 경위에서 시작했다. 수십 년 전 이야기다. 경찰은 지원자가 급증하면서 이 계급을 경장으로 한꺼번에 두 계급을 낮췄고 얼마 안 가 마지막으로 한 계급 더 낮췄다. 지난해 18개 언어권에서 전체 70명을 선발한 외사 특채에는 약 1100명이 지원했다. 이들 대부분이 유학파라고 한다.
과거 사법고시 합격자를 대상으로 했던 사시 특채는 지난해 변호사 특채로 바뀌면서 계급이 경정에서 경감으로 한 계급 낮아졌다. 직책으로 치면 일선 경찰서 과장급에서 계장급으로 낮아진 것이다. 이 역시 로스쿨 출신이 배출되면서 변호사 자격증이 크게 늘어난 사정과 관련이 있다. 경찰은 범죄 대응력을 강화하기 위해 올해도 전·현직 운동선수 50명을 무도 특채로 뽑을 계획이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
“남을 돕는 직업이잖아요” 태권여제 임수정 경찰 됐다
입력 2016-02-04 2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