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기 없는 얼굴에 배 위로 바짝 치켜 올린 바지를 입고 “김사장~ 반갑구만 반가워요”를 외치는 덕선이를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을까. 오리머리를 손으로 쥔 채 뜯어 먹고, 가방에서 불에 탄 비둘기를 꺼내며 배시시 웃는 모습도 사랑스러웠던 덕선이. ‘응답하라 1988’(응팔)에서 완벽하게 성덕선이 됐던 혜리를 지난 26일 서울 성동구 한 호텔에서 만났다.
곱게 화장을 한 혜리에게선 덕선이와 달리 여성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다. 종영 소감을 묻자 “많은 분들에게 소중한 추억을 하나 만들어드린 것 같아서 좋았어요. 배우들이 웃음과 눈물을 드리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게 뭔지 조금은 알 것 같더라고요”라고 말했다.
응팔이 방송되기 전 혜리를 캐스팅 한 것에 대한 우려가 많았다. 연기 경험이 거의 없는 걸그룹 출신에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게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혜리는 첫 회부터 모든 우려를 씻어냈다. 예뻐 보여야 하는 걸그룹 멤버인데도 화장기 없는 얼굴로 카메라 앞에 섰다.
“감독님이 학생주임처럼 검사하셨어요. 속눈썹 들어 보시고, 얼굴에 화장품 묻어나나 확인하시고. ‘화장을 안해야 덕선이가 나온다’고 하셨으니까 저도 따랐죠. 가수와 배우는 전혀 다른 직업이잖아요. 반전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렇게 해야 또 가수로서도 먹고 사는 것 아니겠어요. 하하.”
덕선이처럼 솔직했고 시원시원했다. 하지만 혜리가 덕선이 같지는 않다고 강조했다. “너랑 덕선이가 비슷해서 편했겠다고 말씀하시면 되게 속상했어요. 저는 잘 모르지만 무의식적으로 비슷한 면이 있긴 했나 봐요. 전 그걸 자각하는 게 사실 어려웠어요.”
혜리는 1~4회 촬영에 특히 온 힘을 쏟았다고 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왜 나만 덕선이야…나도 계란 후라이 좋아해. 나도 생일 따로 하고 싶다고!”하며 식구들 앞에서 울며 소리친 대목을 꼽았다.
“그 장면은 지금도 대사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달달달 외울 정도로 준비를 많이 했어요. 케익에 불만 켜도 눈물이 나올 정도로요. 중요하고 어려운 장면이었으니까. 아직도 마음에 많이 남아요.”
남편이 누가 될지 언제 알았느냐는 질문에는 “시청자 분들과 비슷하게 알았다”고 했다. 결말에 대해 비판과 논란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자 복잡한 표정이 잠시 얼굴을 스쳤다. 하지만 이내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도 남편이 그때야 누구인지 듣고 혼란스러웠던 것도 사실이에요. 그래서 세세하게 덕선이의 감정을 따라가야 하니까 감독님, 작가님과 얘길 많이 나눴어요. 더 설득력 있게 표현하려고요. (결말에 대해) 제가 좋다 아니다 할 수는 없는 일 같아요. 대신 보시는 분들이 어떻게 편하게 받아들이실 수 있을지를 놓고 고민을 많이 했어요.”
태국 푸켓으로 떠난 포상휴가에서 출연 배우들과 결말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고 한다. “저희들은 그걸 중요하고 심각하게 문제 삼진 않았어요. 가볍게 얘기한 적은 있었고요. 모든 배역이 예쁘게 만들어진 쪽으로 결말이 만들어진 게 아닌가 생각돼요.”
그래서인지 성인 덕선이는 고등학생 덕선이와는 어딘가 달랐다. 94년도 스물넷의 덕선이에게서는 “얘랑 불알친구예요”라는 말을 서슴없이 꺼내던 고등학생 덕선이의 모습을 찾기는 힘들었다. 말 대신 표정으로 이야기해야 했다. 스물 둘 혜리가 겪어보지 않은 나이였기에 조금 더 어려웠다고 한다.
“여고생의 우악스러운 표정을 덜 쓰려고 했죠. 어린 덕선이가 말로 다 쏟아냈던 것을 성인 덕선이는 ‘점점점(…)’으로 표현하는 게 많았어요. 슬퍼도 참을 줄 아는, 성숙해진 덕선이를보여드리려고 표정 연기에 많이 신경을 썼어요.”
이제 막 응팔을 끝냈는데 벌써부터 차기작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나오고 있다. 덕선이를 능가할만한 배역을 만날 수 있을지, 덕선이라는 강렬한 캐릭터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다른 색깔의 연기를 보여줄 수 있을지 등의 질문이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혜리는 아직 덕선이에게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 했다고 한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죠? 못 나왔다는 게 맞을까요, 안 나왔다는 게 맞을까요? 어떤 거지? 어쨌든 아직도 덕선이가 너무 좋고 덕선이에 대한 마음이 커서요….”
차기작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한다. 혜리는 “준비를 많이 할수록 성과가 크다는 걸 깨달은 것 같다. 걸스데이 앨범이 됐든, 다음 작품이 됐든 좋은 곡, 좋은 작품으로 인사드리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지금 당장 혜리가 하고 싶은 것은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이라고 한다. 가족과 함께 여행도 가고 평범한 시간을 보내며 재충전을 꿈꾸고 있다. “무엇보다 많이 자고 싶어요. 진짜 못 잘 때는 한 시간도 못잔 적도 있어요. 그래도 보통 3~4시간, 많이 자면 5시간은 잤는데 7개월 가까이 촬영하면서 피곤했나 봐요. 잠시나마 88년도 덕선이로 살았던 것은 정말 행복했습니다.”
문수정 기자 thursday@kmib.co.kr
덕선이도 진짜 몰랐던 어남택 결말… “남편 알고 혼란” 인터뷰
입력 2016-01-28 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