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온의 영화이야기] (55) 시니어 무비

입력 2016-01-25 14:22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전 세계적으로 고령화 추세가 심화되면서 노인을 주제로 하거나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늘고 있다. 가장 최근에 나온 것만 해도 ‘유스(Youth)'와 ‘인턴(Intern)’이 있다.

‘유스’가 나이 들어 은퇴한 뒤 한가하게 여생을 보내는 것 외에 다른 일에 일절 신경 쓰지 않는 저명 지휘자와 생의 마지막까지 창작의욕에 불타는 노(老)영화감독의 우정과 노후를 기복 없이 그리고 있다면 ‘인턴’은 역시 현역에서 은퇴한 70세 노인이 시니어 취업 프로그램에 참가해 닷컴기업의 새내기 인턴으로, 그러나 젊은 CEO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새 출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유스’가 전통적인 이야기 구조와는 별 상관없는 구성으로 인해 거기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이라면 다소 혼란스러움을 느끼게 되는데 비해 ‘인턴’은 기승전결이 분명한 할리우드 문법에 충실해 안정감을 준다. 그러나 영화적 구성이야 어쨌든 주연을 맡은 노배우들은 ‘역시’라는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훌륭하다. 마이클 케인과 하비 키틀(이상 ‘유스’), 그리고 로버트 드 니로(인턴).

하긴 전성시절 못지않게 활약하는 노장 배우들이 이들뿐이랴. ‘송 포 유(Song For You, 2012)’에서 괴팍하고 까칠한 노인네로 나와 중병에 걸려 먼저 떠난 아내에 대한 순애보를 보여주는, 젊은 시절 희대의 꽃미남이었던(윌리엄 와일러의 1963년작 ‘콜렉터’를 보라) 테렌스 스탬프와 부인 역의 바네사 레드그레이브는 어떤가.

또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인생을 정리하거나 오히려 새롭게 인생을 살기 위해 인도의 한 호텔에 모여든 영국 노인네들의 이야기를 다룬 ‘베스트 엑조틱 매리골드 호텔(The Best Exotic Marigold Hotel, 2011)'에서 노익장을 과시한 멋진 배우들, 최상급 노(老)여배우의 쌍두마차라 할 수 있는 매기 스미스와 주디 덴치, 그리고 빌 나이와 톰 윌킨슨은?

이 영화는 일반적인 예상을 뒤엎고 흥행에도 성공함으로써 속편(2015)도 만들어져 미국 배우 리처드 기어가 새로 합류하기도 했다. 왕년의 남성 섹스 심볼 기어는 이 영화에서 늙어도 섹시할 수 있음을 과시했다.

섹시함뿐이 아니다. 늙어서도 변함없이 터프함과 마초스러움을 보여주는 배우들도 있다. 우선 클린트 이스트우드. 스스로 감독 주연을 맡은 ‘그랜 토리노(Gran Torino, 2008)'에서 그는 반세기도 더 지난 한국전쟁에 참전한 늙은 용사로 나와 한국전에서 사용했던 M1소총을 들고 이웃 소수민족을 괴롭히는 깡패들을 무찌른다.

그런가 하면 한창 시절 007의 유일한 라이벌이었던 ‘국제첩보국(1965)’의 첩보원 해리 파머로 분했던 마이클 케인은 ‘해리 브라운(2009)’에서 불량청소년들에게 친구가 살해당하자 ‘눈에는 눈’ 식으로 불량청소년들을 응징하는 노인 퇴역 해병대원으로 나와 “노병(老兵)은 죽지 않는다”는 말을 실감케 했다.

이와 함께 각각 ‘성난 황소(1980)’와 ‘록키’ 시리즈에서 복서로 열연한 로버트 드 니로와 실베스터 스탤론은 ‘그루지 매치(Grudge Match, 2013)’에서 영화제작 당시 각각 70, 67세의 나이에 복싱선수로 나와 링에서 맞붙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이같은 노인 배우들의 액션연기는 아무래도 체력적으로 한계가 있는 만큼 예외적일 수밖에 없다. 대신 노인이 주인공인 영화들은 대체로 질병, 치매 등 노년의 위기를 극복하는 법, 아니면 자식 등 젊은 세대들과의 불화 해소 및 관계 회복 같은 주제에 초점이 맞춰지거나 기껏해야 노후의 새로운 삶을 즐기는 모습을 담게 마련이다.

이를테면 치매에 걸린 아내가 평생을 함께 한 남편을 까맣게 잊고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인 줄리 크리스티 주연의 ‘어웨이 프롬 허(Away From Her, 2006)'나 어릴 적부터 친구인 네 노인이 의기투합해 라스베가스로 ‘총각파티’ 여행을 떠나 인생의 ’절정기‘를 마음껏 즐긴다는, 마이클 더글러스, 로버트 드 니로, 모건 프리먼, 케빈 클라인 주연의 ’라스트 베이거스(Last Vegas, 2013)', 그리고 걸작 클래식 반열에 오른 ‘황금연못(On Golden Pond, 1982)' 등이다.

만년에 호숫가 별장을 찾은 노부부가 죽음을 앞두고 소원했던 딸과 관계를 회복한다는 내용의 ‘황금연못’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인데 노부부로 나온 헨리 폰다와 캐서린 헵번은 기막힌 연기로 둘 다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았다. 이 영화는 특히 딸 역으로 헨리 폰다의 실제 딸로 아버지와 사이가 과히 좋지 않았던 제인 폰다가 출연해 더욱 감동적이었다.

이밖에도 오리지널 ‘장고(Django, 1966)'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함께 양대 스파게티 웨스턴 스타로 군림했던 프랑코 네로가 멋지게 늙은 모습으로 실제로도 연인 겸 아내였던 바네사 레드그레이브의 젊은 시절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깜짝 등장해 올드 팬들을 즐겁게 했던 ‘레터스 투 줄리엣(Letters To Juliet, 2010)’이나 중병에 걸려 죽을 날만 기다리던 두 노인이 죽기 전에 꼭 하고 싶던 일들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는 잭 니콜슨, 모건 프리먼 주연의 ‘버킷 리스트(The Bucket List, 2007)’와 옛날 영화로 외계인을 만나 다시 젊어진 노인들의 이야기인 돈 아미쉬, 흄 크로닌, 제시카 탠디 주연의 ‘코쿤(Cocoon, 1985)', 그리고 늘그막에 진정한 사랑을 발견한다는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Something's Gotta Give, 2003)' 역시 노인들을 내세운 노인들의 영화다. 물론 ‘사랑할 때~’에서 주연을 맡은 다이앤 키튼은 영화에서 60대로 나온 잭 니콜슨과 달리 50대로 나와 노인이라고 하기엔 좀 뭣하지만.

앞으로도 이어질 노인 영화가 지향해야 할 방향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인턴’의 오리지널 포스터 카피에 잘 나타나 있다. ‘Experience never gets old(경험은 결코 늙지 않는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 더 보탠다면 노인들이 풍부한 경험과 경륜만 젊은 세대에 강조할 게 아니라 그들의 든든한 지지대, 기댈 언덕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인턴’에서 드 니로가 앤 해서웨이에게 해 준 것처럼.

김상온(프리랜서 영화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