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화 경동교회 원로목사와 연규홍 한신대 신학대학원장의 1월 20일 대담 전문>
-지난해 12월 27일 경동교회에서 은퇴한 소감부터 말해 달라.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프리덤 프롬(Freedom from,~로부터의 자유)’과 ‘프리덤 투(Freedom to, ~을 향한 자유)’에 빗대고 싶다. 평소 신학하면서 내가 갖고 있는 삶의 가치관 중 중요한 것이 자유다. 나의 은퇴는 경동교회 목회로부터의 해방이다. 동시에 교회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삶의 영역으로 뛰어들어 기독교적 가치관을 정립하는 데 헌신할 수 있는 자유이기도 하다.”
-입장이 제사장에서 예언자로 바뀌었다. 한국사회를 위해 어떤 예언자적 역할을 할 것인가.
“예언자적 사명이란 인간을 압제와 굴레로부터 해방시키는 것, 동시에 ‘프리덤 투’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대안 없이 비판만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진짜 자유가 아니다. 지금 필요한 예언자적 역할은 대안을 세우는 활동이다. 한국사회는 빈곤으로부터 해방되고 경제발전은 이뤘지만 삶의 질을 높여주는 경제발전으로 가지 못하고 좌충우돌하고 있다. 다른 영역에서도 아니면 말고 식의 비판은 많지만 대안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가 해방되고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됐지만 진짜 자유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통일이 돼야 한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결국 통일이다. 중요한 건 나라의 통일만이 아니라 사고의 통일, 적대적으로 사는 한민족으로서 동질감의 회복이다. 한 나라가 끝나고 새로운 나라가 들어서는 왕조사, 국가사처럼 통일을 인식하는 건 잘못이다. 바로 지금 함께 사는 과정 하나하나가 통일의 한 장이다. 하나의 나라가 되는 건 형식적 완성이다. 이에 앞서 사회적 통합, 정신사적 합일에 중점을 두고 통일 논의를 해 나가려 한다. 남북이 이질적인 사회가 됐지만 적대적 남남이 아니라 평화적 남남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다르지만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서로 교통하며 살 수 있는 통합에 중점을 둔 통일 논의에 집중하려 한다.”
-분단 이후 교회가 남북을 공존적 관계가 아니라 적대적 관계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비판을 듣는다. 한국교회 안의 반공 논리, 반북 논리가 우리의 삶을 내면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예수 잘 믿으니 남한만 구원받고 북한은 심판받을 것이라는 태도는 성경의 관점에서 어긋난다. 신학의 관점은 ‘내가 하나님 편이다’이지, ‘하나님이 내 편이다’가 아니다. 진실로 내가 하나님의 편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 생각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있는 것인지 진보와 보수 모두 솔직하게 반성해 봤으면 좋겠다. 이는 북한도 마찬가지다. 종교를 아편이라고 하지만 하나님 편에서 봤을 때 하나님이 북한 편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끼리 갖고 있는 불필요한 적대관념은 해소해야 한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원수를 두면 내 삶의 주인이 원수가 된다. 원수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내 삶이 바뀌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건 똑같이 원수로 여기지 말고 사랑으로 이겨내라는 것이다. 나를 원수로 여기는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워야지, 속박당해선 안 된다.”
-5만여 한국교회가 남북 화해에 앞장서기 위해선 적대감을 극복해야 한다. 평화신학, 평화목회를 해온 입장에서 조언을 해 달라.
“전쟁은 해법이 아니다. 전쟁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희생당했나. 전쟁에서 벗어나려면 안보는 필요하다. 상대방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안보를 하는 게 맞다. 일각에선 핵무기 갖는 걸 안보라고 생각하는데 난 달리 본다. ‘인간안보’가 핵심이다. 전쟁을 못하게 만드는 평화 정신이 곧 인간안보다. 안보를 움직이는 사람이 먼저 서야한다. 전쟁을 피하는 게 평화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전쟁을 못하게 만드는 것이 평화다.
북한 사람들이 ‘왜 남조선은 우리가 핵무기 가졌다는 데 벌벌 떨지 않는가’라고 묻더라. 일본 나가사키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후 핵무기는 단 한 번도 쓰인 적이 없고 쓰일 수도 없는 무기가 됐다. 쓰면 공멸인데 그러고 싶은 지도자가 세상에 어디 있겠느냐, 그래서 더는 협박 수단이 될 수 없다고 설명했다. ‘핵 협박’이 안 통하는 사회를 만드는 게 평화다. 핵무기 갖는 것을 부끄럽게 만들자. 핵무장을 하자고 할 게 아니라 핵무기를 무용지물로 만들어야 한다.”
-핵무기를 무력화하는 평화적 신앙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평화란 마음껏 자유를 누리면서 책임 있는 자유를 행사하는 것이다. 단순히 전쟁의 반대가 아니라 진짜 행복한 것이 평화요, 불행하면 전쟁이다. 정보와 기술이 얼마나 발전하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느냐고 하는데 사람의 마인드가 기술을 지배하지 기술이 마인드를 지배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걸 사람들은 잊고 산다. 생명을 중시하지 않는 사회는 실패한다. 단순히 내가 태어났다 죽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 내 안에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자꾸 안보·이념·기술·물질과 같은 형이하학적 가치에 묶이는 모습이 안타깝다.”
-통일 시대를 대비하는 데 필요한 리더십은.
“과거에는 ‘톱-다운(top-down)’ 방식으로 지도자들이 나를 따르라고 하면 따라갔다. 반대로 바닥에서 조직해서 위로 치고 올라가는 ‘보텀-업(bottum-up)’ 방식도 있었다. 산업화·민주화시대까지는 통했지만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다. 학문적으로 말하면 포스트모던 시대다. 내가 교회에서 본 건 이제 각 주체가 선을 따라 올라가거나 내려오는 게 아니라 서로 연결해서 ‘망의 공동체’를 이룬 세상이 됐다는 것이다. 서로 연결돼 있어서 망 하나가 망가지면 다 망가진다.
상당 부분 자유인이 된 개인들은 완벽하진 않지만 저마다 역할을 하고 싶어 한다. 오케스트라에 비유해보면 개인은 악기다. 하나님으로부터 다양한 달란트를 받았다. 경동교회에 가 보니 다양한 구성원들 각자가 자기 달란트를 발휘하게 해줘야 하더라. 각자 자기 소리를 내는 건 솔로로 하고, 함께할 때는 화음을 내도록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
다양성 속에서의 합일이 화음이다. 그래서 망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철학은 화합이고 평화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 필요하다. 화음이 있는 사회야말로 선진 사회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 ‘화(和)’가 부족한 것이 문제다. 혼자만 잘나면 무엇 하나, 서로 화(和)해야지.
교회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본받자고 모여서 ‘공동선’을 찾는 곳이다. 목회자는 지휘자다. 핵심은 복음이다. 복음의 가치를 부여잡고 정치·경제·과학·사회 어떤 직업이든 각자 영역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실컷 불어보라는 것이다. 과거 상상도 못했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화(和)의 신학’을 통일 문제에 적용해본다면.
“남북이 70년간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절대로 ‘동(同)’ 즉, 같을 수는 없다. 같은 민족이란 것을 빼면 사고방식부터 모든 게 다 다르다. 통일이 무엇이냐. 각자 좋은 점을 갖고 와서 화(和)하고 서로 죽이는 것 하지 말고 화(和)하자는 것이다. 나눌 수 있는 것을 나누자는 것이다. 정치는 적대관계에 있더라도 사회·문화·예술 중 ‘화(和)’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남과 북이 함께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고전을 발굴할 수도 있다. 정부는 갈등관계에 있어도 경상북도와 함경북도는 지방 차원에서 화해할 수 있다. 이렇게 ‘화(和)’를 시작하는 게 평화적 공존이다. 기독교는 물론 종교인평화회의 같은 단위에서도 화(和)할 수 있다. 이념적 틀 하나로 모든 걸 평가하지 말자.
내가 독일에서 배운 게 바로 이런 것이다. 독일에서는 정치가 매섭게 대립해도 예술·문화·교회에서는 화해하더라. 그러면서 정치도 이념도 유연해졌다. 원수에 매이는 게 아니라 원수 됨을 푸는 지혜를 발휘하는 게 선진 사회다. 독일은 정치·사회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절대 다수당을 두지 않는 정치제도 속에서 당끼리 화합하는 연정이나 정책연합으로 사회 문제를 풀어나간다. 노와 사도 같지 않지만 타협해나가며 답을 찾더라.
-화합, 타협과 조정, 연대와 같은 가치들이 중요하다는 것인데.
“한국에서는 정치적 타협을 나쁘게 보는 데 절대 그렇지 않다. 독일의 경우 각자 다른 건 알아서 하되, 통일과 같이 정파를 초월한 문제는 파당적으로 하지 말자고 합의하고 그렇게 해 나간다. 에큐메니컬 진영에서도 공동으로 ‘화(和)’할 수 있는 것만 화합하고 나머지 서로 다른 것은 그대로 내버려둔다. 한국에서는 그걸 정죄하는데 어리석은 짓이다. 상대적 진실, 상대적 선을 추구하는 게 바람직한데 우리는 스스로가 상대적인 줄 알면서도 항상 절대화하는 우를 저지른다.”
-한국사회의 미래를 준비하는 상황에서 대학 강의와 교육 패턴을 미래 지향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19세기 교수들이 20세기 교실에서 21세기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말이 있지 않나.
“처음부터 ‘화(和)’를 생각하고 공부하는 것과 죽으라고 내 악기만 연주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공부하는 것은 다르다. 내가 트럼펫 혼자 열심히 불어봐야 오케스트라는 안 된다. 때로는 솔로도 필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오케스트라라는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런 훈련이 안 돼 있다. 목회를 하면서 설교 한 편 준비하기 위해 일주일 내내 공부하고 생각했다. 일주일 내내 끊임없이 이걸 어떻게 전달할까 생각했다. 대학에 다닐 때 내게 그만큼 생각을 많이 하도록 공부시킨 과목이 없었다.
현재 한국의 대학 교육은 사고 훈련은 안 시키고 지식 습득만 시킨다. 지식 축적은 가능하지만 지혜의 발굴은 어렵다. 필수 과목은 줄이고 선택 과목을 늘여서 학생들이 스스로 선택하고 나름대로 화(和)할 수 있는지 없는지 깨닫게 해야 한다. 하나의 테마를 주고 스스로 여러 과목을 모아서 수렴하고 통섭하고 융합하는 능력을 길러주면 좋겠다. 지금은 지나치게 단편적으로만 본다. 축적된 지식을 단면적으로 쓸 수는 있으나 창조적인 사용이 어렵다. 새로운 걸 만드는 게 창조가 아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하나님만 할 수 있다. 우리는 유, 흐트러진 단자를 각자 콘덴서로 모아서 창조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경동교회에서 설교할 때 교인들은 목회자나 신학생이 아니다. 다양한 직업군이 있다. 그들이 모두 화합할 수 있도록 구약과 신약 중에서도 예수님 말씀과 서신서 말씀 세 가지를 골라 함께 설교했다. 창조적인 그물 만들기라고 할 수 있는 융합 신학을 시도했다.”
-그런 사고의 훈련, 융합하기 위한 노력은 언제부터 하게 됐나.
“한신대 1학년 때 김재준 목사님의 기독교개론 수업을 들었다. 숲에서 왔다 갔다 하며 길을 잃지 말고 봉우리에 오르라고 하셨다. 한 봉우리에 올라가면 다른 봉우리가 보인다고. 봉우리에 오르지 못하면서 이리저리 다니는 건 혼합, 잡탕에 불과하다. 한 봉우리에 올라가서 다른 봉우리를 보면서 숲을 보는 것, 그리고 그걸 연결해 내는 것이 통섭과 융합이다. 한국교회가 먼저 한국의 봉우리를 세우고 거기까지 올라갈 수 있으면 좋겠다. 지금 모든 세계교회가 한국교회의 애타는 가슴, 영성 등을 강조하고 있다. 밖에서도 그걸 봉우리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독백성 신학이 아니라 전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신학을 내놔야 한다.”
-한국교회가 이제는 복음을 발신하는 복음강국으로 가야 한다는 지적에 동감한다. 저마다의 봉우리를 연결하는 하모니의 복음, ‘화(和)’의 복음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각자의 특성을 보고 배려하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평생 성경을 통해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면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남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다. 내가 설교 한 편 했을 때 그날 설교가 나 자신을 감동하게 했는지 아닌지는 내가 제일 잘 안다. 나를 감동시키지 못한 설교는 남도 감동시키지 못한다. 자기 사랑도 못하면서 이웃 사랑한다고 떠벌리고 다니거나 자기 사랑에만 머무르지 말길 바란다.
우리에겐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사람의 지혜를 넘어설 수 있는 백그라운드가 있다. 내가 목회를 하는 동안 교인들이 얼마나 은혜 받았는지 모르지만, 내가 더 은혜를 많이 받았다. 상대방의 관심사에 들어가 보지 않으면 서로 조화시킬 수가 없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관심 속에 들어가 보며 이해할 수 있었다.”
-언론 역시 매우 중요하다. 국민일보는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진보에선 시시하다고 하고, 보수에선 조금만 다르게 써도 좌로 간다고 비판한다. 국민일보는 좌와 우 가운데의 중립이 아니라 중심에 서야 한다. 핵심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겠느냐’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셨을 것이라고 믿고 쓴다면 성령이 교통시켜 주실 것이다. 국민일보는 ‘예수 정론’을 펴야 한다. 기자들 스스로 ‘나는 예수의 이름으로 정론을 펴겠다’고 생각하면 글이 달라질 것이다. 독자들이 글을 읽으면서 이 사람이 진실로 기독교적인 가치와 사상을 추구한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신문을 살릴 것이다.
현재 기독교가 사회적으로 비판받는 건 사실이다. 회개가 필요한 부분도 있다. 하지만 그 숫자만큼 힘도 갖고 있다. 국민일보를 모든 기독교인이 좋아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이름으로 말할 수 있는 신문은 국민일보가 유일하다. 그걸 제대로 하느냐 못하느냐는 별도의 문제이며, 그걸 제한으로 볼지 무엇으로 볼지도 국민일보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일반 보도는 똑같이 하더라도 결국 특별한 가치 판단을 해야 할 경우에 기준은 ‘예수는 이렇게 하셨다’라는 게 돼야 한다.”
-국민일보는 한국교회 800만 성도들에게 어떻게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조용기 목사님을 중심으로 일간지를 시작한 건 대역사다. 순복음교회 신문으로 머물지 않고 전체 기독교계 신문으로 내놓은 게 두 번째 대역사다. 거기에 멈췄다면 특정 교파 신문에 그쳤을 텐데, 그 씨앗에 물을 줘서 한국교회 전체가 보게 됐다. 이제 제3의 역사는 국민일보가 기독교인 아닌 사람들도 사랑하는 신문이 되는 것이다. 신문의 몸을 통해 하나님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는 것. 그래서 기독교인뿐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복음을 접하게 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정리=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
<박종화 경동교회 원로목사와 연규홍 한신대 신학대학원장의 1월 20일 대담 전문>
입력 2016-01-22 17:38 수정 2016-01-22 17: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