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부탁을 받고 망설였다. 난민 캠프의 참혹한 풍경에서 네 살배기 딸을 구해달라는 간청이었다. 몇 번이고 거절했지만 부탁은 계속됐다. 결국 아이의 웃는 얼굴을 외면하지 못한 남자는 승합차에 아이를 싣고 국경을 넘으려다 실패했다. 경찰이 끌어낸 아이는 몸을 웅크린 채 곰인형을 가슴에 안고 있었다. 남자에게는 범법자라는 딱지가 붙었다.
난민 소녀에게 도움을 주려다 법을 어긴 영국의 한 전직 군인의 사연이 화제가 되고 있다. AP통신은 영국 제대 군인 출신인 롭 로리(49)가 프랑스 칼레 난민 캠프에 머물던 아프가니스탄 출신 난민 소녀 마하르 아마디를 영국에 밀입국 시키려한 혐의로 프랑스 법정에 서게 됐다고 1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혐의가 인정될 경우 최대 징역 5년 또는 3만 유로(약 3900만원)의 벌금을 물게 된다.
로리는 이전까지 영국 런던 북부 귀즐리에서 카페트 세탁사업을 하며 네 아이를 키우던 평범한 가장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9월 언론을 통해 터키 해안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세 살배기 시리아 난민 아이 에일란 쿠르디의 사진을 접하고 인생이 바뀌었다. 로리는 일을 관두고 난민 밀집지역인 프랑스 칼레와 뒹게르크 등을 오가며 난민 쉼터를 짓는 등 봉사를 시작했다. 아내는 가정도 버려둔 채 봉사활동에 몰두하는 그를 남겨두고 아이들과 함께 떠났다.
아마디의 아버지인 아프간 난민 레자 아마디의 부탁을 받은 것도 같은 달이었다. 칼레 난민 캠프에서 머물던 그는 자신 대신 딸 ‘브루’(아마디의 애칭)만이라도 데려가 영국 북부에 사는 친척에게 맡겨달라고 로리에게 부탁했다. 요청을 거절하지 못한 로리는 브루를 자신의 승합차에 숨긴 채 페리선을 타고 영국에 들어가려다 단속에 적발됐다. 브루는 칼레 난민 캠프로 돌려보내졌다.
대표적 난민 도시 칼레에는 아프간 등에서 온 난민 약 4200명이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 시 당국에 따르면 지난 6개월 간 이 지역에서 죽은 난민은 확인된 것만 17명에 달한다. 특히 겨울에는 비라도 오면 추위를 막아줄 텐트가 무너질까 두려움에 떨어야 한다. 로리는 “비 내리던 밤 아이가 내 무릎을 베고 잠든 걸 보고 도저히 이런 곳에 남겨둘 수 없단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현지 난민 봉사단체에 따르면 브루는 아버지와 함께 여전히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안타까운 소식이 알려지자 로리의 페이스북에는 그를 ‘영웅’이라 부르며 무죄를 청원하는 이들이 몰리고 있다. 로리는 이 같은 반응에 “영웅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사람들을 구한 오스카 쉰들러나 마틴 루터 킹이지, 나 같은 사람이 아니다”라며 “그저 자유를 잠깐 담보 잡힌 전 세탁소 주인일 뿐이다”라고 고개를 저었다. 로리의 재판은 14일에 진행될 예정이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
난민 소녀 구하려다 재판정에 선 ‘칼레의 영웅’
입력 2016-01-13 17:23 수정 2016-01-13 17: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