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유롭고, 두렵지도 않네. 나는 절대 죽지 않는 비밀이요, 굴하지 않는 목소리라네.”
5년 전인 2011년 1월, 중동국가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 부기바 거리에 한 여성의 목소리가 현악기 선율을 따라 울려 퍼졌다. 노래를 듣고 독재 정권에 들고 일어선 튀니지 시민들은 1월 14일 약 25년간 집권해 온 제인 엘아비디네 벤 알리 대통령의 사임을 이끌어냈다. 목소리의 주인공인 가수 에멜 마트루티는 지난해 12월 스웨덴 오슬로에서 열린 노벨 평화상 시상식에서도 이 노래 ‘켈름티 호라(나의 언어는 자유)’를 불렀다.
국제인권감시기구인 프리덤하우스에 따르면 지난해 튀니지는 역사상 처음으로 ‘완전한 자유국가’ 반열에 들어섰다. 매년 발표되는 국제민주주의순위(Democracy Index)에서도 32계단이 상승했다. 혁명 이후 한동안 혼란기를 겪었으나 2014년 새 헌정이 출범하면서 민주주의가 안정에 접어들었다는 평가다.
◇ 찬란했던 봄은 어디로
하지만 튀니지 이외에 당시 대규모 시위가 있었던 중동 5개 국가 중 민주화를 이뤄낸 곳은 전무하다.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최신호에서 2011년 중동에 불었던 민주화 바람인 ‘아랍의 봄’ 5주년을 맞아 현 중동정세를 정리했다. 당시의 민주화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테러 등으로 인해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이 둔화되었으며, 이로 인해 오히려 혁명 이전보다 못한 상태가 되었다는 분석이다.
민주화를 쟁취한 튀니지와 달리 이외 중동국가들은 독재와 내전이 더 악화됐다. 리비아와 예멘은 내전이 격화해 정부가 피난길에 나서야 했다. 외세의 개입과 더불어 테러단체인 알카에다와 이슬람국가(IS)가 마수를 뻗쳤다. 이집트와 바레인은 예전보다 더한 독재국가가 됐으며, 시리아는 끝 모를 나락으로 떨어졌다. 알제리와 수단은 이제 막 내전을 끝냈지만 군부파벌에 의해 혼란이 지속되는 중이다. 중동 전체를 놓고 봐도 일부 석유부국과 모로코 정도를 제외하면 성한 곳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석유부국이라고 상황이 좋은 것은 아니다. 이들 역시 최근 국제 유가 폭락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타 중동 국가나 아시아 등으로부터의 이민도 제한됐다. 이들이 본국으로 보내는 돈 때문에 경기 침체가 악화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국제노동기구(ILO) 조사에 따르면 2011년 25%를 기록했던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 청년실업 인구는 현재 30%까지 올라갔다. 세계 평균의 2배에 달하는 수치다. 지역 분쟁과 계급 갈등이 심화된 탓에 청년들은 IS 등이 주장하는 ‘이슬람 유토피아’가 유일한 해결책이라 여기고 있다.
◇ 어설픈 개입이 부른 혼란
이코노미스트는 아랍의 봄 이후 서방국들의 어설픈 개입이 중동의 상황을 악화시킨 주요 원인이라고 짚었다.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등 독재자들이 알아서 무너질 것이라 판단한 게 첫 번째 오판이었다. 서방의 예상과는 달리 이들은 시위가 격화됐을 당시 잠시 물러났다 다시 정권을 잡았다. 혹은 이들의 뒤를 이어 더한 독재자가 나타났다.
아랍의 봄 이후 이집트의 상황은 이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2011년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물러난 뒤 이어진 선거에서 대통령 자리에 앉은 건 이슬람 근본주의 정당인 무슬림형제단이 내세운 무함마드 무르시였다. 통치 경험이 없던 이들은 분열과 반목을 거듭한 끝에 2013년 군부 쿠데타를 맞아 몰락하고 말았다. 군부 출신으로 정권을 이어받은 압델 파타 엘시시 대통령은 오히려 전보다 더한 철권통치를 강행했다.
엘시시 대통령 집권 뒤 지금까지 최소 2500명이 시위에서 사망했으며 4만명 이상이 정치적 이유로 체포됐다. 엘시시는 현지 언론까지 손아귀에 넣어 비판여론을 묵살시키고 있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 독일 등 서방국은 어중간한 태도를 취하거나 외려 군사협력에 나섰다.
혁명에 반하는 이웃 중동국가의 개입을 과소평가 한 것도 실책으로 꼽힌다. 바레인의 경우 왕가에서 같은 수니파 이슬람 국가들을 끌어들여 당시 시위를 이끌었던 시아파 집단을 제압했다. 예멘에 대한 사우디아라비아의 개입도 예로 들 수 있다. 이웃국가 이라크와 터키 등의 개입으로 엉망이 된 시리아의 상황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 아직 오지 않은 ‘진짜’ 혁명
민주화가 잠시 늦춰졌을 뿐, 언제든 변화는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란 전망도 있다. 아랍권 알자지라 방송에 따르면 현재 중동국가들의 24세 이하 인구 문맹률은 10% 이하다. 사우디와 리비아, 쿠웨이트의 경우에는 거의 0%에 가깝다. 65세 이상 인구의 문맹률이 70%에 이르는 데 비하면 대조적이다. 읽고 쓸 줄 아는 청년층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언제든 이들의 힘으로 또 한번의 ‘봄’이 찾아올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다시 한 번 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에 ‘이슬람식’ 민주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동 전문가인 고칸 바시크 터키 이페크국제대 교수는 일간 자만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혁명은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보다 당장의 가난 때문에 격화된 측면이 있다”면서 “이슬람 사회가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실패했다”고 진단했다.
이코노미스트 역시 부패 청산 등 구호만 난무했을 뿐 인권 등을 존중하는 보편적인 민주제가 정착되지 않은 점을 문제로 지적했다. 혁명 직후 민주주의보다는 이슬람 율법 샤리아에 의한 통치를 천명했던 무슬림형제단이 정권을 잡거나, 혹은 IS와 같은 극단주의 무장단체가 힘을 얻은 것도 이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
‘아랍의 봄’ 5년 뒤, 폐허만 남은 중동의 겨울
입력 2016-01-12 17:31 수정 2016-01-12 17: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