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 이사장이요? 다들 바쁘고 할 사람이 없어서 백수인 제가 하는 거예요. 하하.”
세계선수권 3연패,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에 빛나는 ‘역도 여제’의 미소는 여전했다. 경기장이나 텔레비전에서는 환호와 박수 때문에 들을 수 없었던 호탕한 웃음까지 곁들여져 반가움이 더 컸다.
올림픽 영웅에서 청소년들이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회활동가로 변신한 장미란(33) 장미란재단 이사장을 지난 7일 서울 삼성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캐주얼한 검정색 폴라티에 푸른색 재킷을 입은 그의 모습은 꽤나 낯설었다. 은퇴한 지 햇수로 4년 차를 맞았지만 여전히 그의 이름 석자에는 보는 이로 하여금 함께 이를 악물고 온 몸에 힘을 주게 하는 역사(力士)의 이미지가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2013년 1월 눈물의 은퇴 기자회견 이후 장미란은 스포츠사회학 박사학위 취득, 국내외 역도연맹 위원활동, 강연, 간증집회 등 현역 시절 훈련 스케줄만큼이나 바쁜 나날을 보내왔다. 빡빡한 그의 일정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재단 일이다. 그는 교통사고 후유증을 극복하며 런던 올림픽 준비에 한창이던 2012년 아버지의 제안으로 재단 설립을 결심했다.
“먼 훗날에나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당시 아버지께서 ‘일은 진행이 될 때 단김에 쇠뿔 빼듯 해야 한다’면서 초석을 잘 다져주셔서 은퇴 후 바로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어요. 아버지의 노력이 없었다면 재단 일은 속도가 더뎠을 겁니다.”
장미란재단의 주요사업은 스포츠를 통해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것이다. 전·현직 국가대표 선수들이 멘토가 되어 스포츠꿈나무들의 길잡이가 돼주는 ‘스포츠 멘토링’, 스포츠꿈나무와 사회배려계층의 건강한 성장을 돕는 ‘의료 나눔’, 현실적 어려움에 처해있는 스포츠 인재들을 지원하는 ‘드림 장학’ 등이 핵심 활동이다.
‘장미운동회’라는 이름으로 스포츠꿈나무들의 훈련현장이나 사회배려계층 청소년이 있는 곳에 찾아가 독려하기도 한다. 지난해 11월에는 탈북청소년 대안학교인 여명학교에서 운동회를 열기도 했다.
장미란은 “말이 이사장이지 봉사자 대표나 다름없다”며 “멘토로 동참해주는 태릉 시절 동료, 선·후배들이 없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라고 동역자들에게 공을 돌렸다. 양궁의 윤미진 박성현, 육상의 여호수아 김건우, 펜싱의 남현희 최병철, 레슬링의 정지현, 유도의 김재범, 배구의 한송이, 배드민턴의 이효정 등 스포츠 스타들이 멘토로 함께한다.
장미란은 국가대표 시절 ‘태릉선수촌 전도사’로 불릴 만큼 대표적인 크리스천 스포츠 스타다. 고된 훈련 일정 속에서도 선수촌 예배에는 빠짐없이 참석했고 선수촌 내 기독선수 모임인 ‘샬롬회’의 총무를 맡기도 했다. 덕분에 슬럼프에 빠진 선수들을 위로할 기회도 많았다.
“위로라기보다는 그냥 제 얘기를 해주는 거죠. 몸과 마음이 힘들어도 붙들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지금 당장 메달을 못 따고 훈련한 만큼 성적이 안나온다 해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 더 좋은 것을 예비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희망을 갖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요.(웃음)”
전장에 나서는 군사들의 훈련소를 방불케 하는 선수촌 시절 다져진 신앙과 긍정적 사고는 재단을 통해 만나는 미래의 꿈나무들에게 오롯이 전달된다. 특히 대회 성적으로만 인생 성패를 가늠하려는 어린 선수들에게는 그 파급력이 어마어마하다.
“고교 전국체전 끝나고 나서 만난 역도 후배가 있었는데 성적이 잘 안 나와서 대학과 실업팀의 스카우트 제의가 없는 상황이었죠. 불과 19세인데 ‘인생의 실패자’라고 생각하고 있더라고요. 그 친구에게 ‘결코 실패가 아니다. 오히려 선수생활 이후의 미래를 먼저 준비할 수 있다. 선수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재활 훈련사나 탁월한 지도자가 될 수도 있다’고 얘기해줬어요. 그 친구 지금 물리치료를 공부하면서 멋지게 꿈을 펼쳐나가고 있습니다. 그 시기를 지나온 선배 입장에서는 별것 아닌 이야기일지 몰라도 그 친구에게는 새로운 인생을 향한 전환점이 된 거죠.”
은퇴 선수 복지에 대한 관심과 관련법 제정의 필요성을 알리는 것도 소외된 체육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다. 장미란은 “국가에 대한 체육인들의 기여도가 다른 분야에 비해 적지 않은데도 은퇴 후 현실은 너무 힘들다”며 “재단 일을 하면서 선수 시절엔 몰랐던 체육계의 복지와 은퇴 선수 사회화 교육 등의 문제에 눈을 떴다”고 말했다.
가장 좋아하는 찬양이 ‘저 장미꽃 위에 이슬’일 정도로 유독 ‘장미’와 인연이 많은 그에게 새해 꽃 피우고 싶은 소망을 물었다.
“재단의 슬로건이 ‘장미꽃은 가시 사이에서 피어난다’예요. 어려움을 이겨내고 자신만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라는 의미죠. 우리 사회가 멋지고 화려한 순간만 기대하기보다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희망의 바벨을 들어올리는 데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 싶어요.”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믿음의 역도선수 장미란, "스포츠 통해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 주고 싶어요"
입력 2016-01-12 16: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