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온의 영화이야기](53) 추리영화 불모시대

입력 2016-01-11 16:22
영화 ‘헤이트풀 8’ 포스터.

‘할리우드의 악동’으로 불리는 퀜틴 타란티노의 영화 ‘헤이트풀 8’을 봤다. 우리말로 뜻을 옮기지 않고 영어 발음 그대로 표기한 영화 제목을 굳이 풀이하자면 ‘증오의 8인’쯤 되겠다.

하지만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의당 의문을 품었겠거니와 도대체 등장인물들이 누구 혹은 무엇을 증오하는지, 나아가 과연 증오를 품고 있는지조차 전혀 알 수 없다. 서로 마구 총을 쏴대기는 하지만 ‘증오’와는 상관없다.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을 뿐.

타란티노의 ‘8번째 작품’이라는 팻말이 오프닝 크레딧의 제목 앞에 명기된 이 영화는 한마디로 ‘저수지의 개들(1992)’ ‘펄프 픽션(1994)’ ‘킬 빌(2003)’ 등 타란티노의 전작들을 짜깁기해놓은 자가복제물에 지나지 않는다.

일부 평자들은 타란티노의 영화적 ‘전통’을 승계했다거나 ‘타란티노적 아이디어의 집대성’이라고 상찬을 늘어놓지만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타란티노가 성공한 전작들의 후광을 이용하기 위해 서부극으로 외양을 꾸미는 ‘잔재주’를 부린 자기복제품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이전 논문을 새 논문인양 복제해 발표하는 게 예사인 극동 어느 나라의 학자들과 동종(同種)이라고나 할까.

하긴 이미 재능이 바닥난 사람에게 뭘 더 바랄까마는 그건 덮어두자. 내 관심은 타란티노라는 B급 감독을 평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쪽에 있으니까. 바로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천착이다.

‘헤이트풀 8’은 무대 배경이 거센 눈보라에 갇혀 고립된 와이오밍의 외딴 잡화점 겸 여행자 숙소다. 여기 여자(호송중인 죄수) 한 사람을 포함해 8명의 인물들이 모여 두 명이 독살 당하고 나머지는 유혈 낭자한 총싸움을 벌인다.

영화 시작 후 약 1시간이 지날 때까지 이렇다 할 사건도 없이 지루하게 잡다한 수다만 난무하는데 그나마 그 수다가 등장인물들의 캐릭터 구축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 그저 시시껄렁한 잡담일 뿐(각본도 타란티노다).

어쨌거나 그러다 처음 사건이 터진다. 폭설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게 된 등장인물들 중 두 명(그 중 한 명은 커트 러셀이 연기한 주연급이다)이 독이 든 커피를 마시고 목숨을 잃는 것.

그러자 영화의 진짜 주인공인 흑인 바운티 헌터 새뮤얼 잭슨이 탐정역을 맡아 누가 범인인지 명쾌한 추리로 풀어낸다(여기서 한 가지 의문. 과연 그 당시 미국 서부에서 흑인이 제대로 사람 대접이나 받았을까. 20세기에 들어와서까지 흑인은 아무리 늙은이라도 “Boy!"라고 불렸고 백인과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흑인이 마치 오늘날 그런 것처럼 당당히 행동하고 백인들에게 융숭하게 대우 받는다. 비록 검둥이(Nigger)라는 멸칭은 가끔씩 들을망정).

시대적 고증과는 상관없이 어쨌거나 영화는 곧바로 피 튀는 유혈극으로 이어진다. 과연 ‘유혈극의 달인’이라는 타란티노의 별명이 무색하지 않다.

그러나 총싸움이 벌어지기 전 잭슨이 추리솜씨를 뽐낼 때까지 영화는 살짝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극을 연상케 한다. 폭설에 갇혀 세상과 격리된 호화열차, 그 안에서 벌어진 살인과 다양한 용의자 승객들, 그리고 명탐정. 셜록 홈즈와 더불어 미스터리 장르에서 명탐정으로 확고히 위치를 굳힌 에르퀼 포와로가 등장하는 유명한 올스타 캐스트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1974)’이나 폭설로 고립된 산장에서 벌어지는 살인극인 ‘쥐덫’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물론 타란티노는 당연히 ‘오리엔트 특급~’을 만든 시드니 루멧이 될 수 없고, 잭슨도 결코 포와로가 아니지만.

‘헤이트풀 8’은 어디까지나 유혈 낭자한 액션 위주의 영화이지 추리에 중점을 둔 탐정물이 아니다. ‘피칠갑의 달인’ 타란티노에게 그런 ‘고급 취향’을 바라는 것은 어쩌면 무리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영화로 연상된 훌륭한 미스터리 영화에 대한 갈증은 어쩔 수 없다.

옛날 존 휴스턴이 더실 해미트의 하드보일드 탐정 샘 스페이드를 데려다 ‘말타의 매(1941, 험프리 보가트)’를, 하워드 혹스와 딕 리처즈가 각각 레이먼드 챈들러의 까도남(까칠한 도시 남자) 탐정 필립 말로를 끌어와 ‘거대한 잠(Big Sleep, 1946, 험프리 보가트)’과 ‘안녕 내 사랑(Farewell, My Lovely, 1975, 로버트 미첨)’을, 그리고 시드니 루멧이 크리스티의 불멸의 탐정 포와로로 앨버트 피니를 기용해 ‘오리엔트 특급살인사건’을 만들었듯 훌륭한 배우들을 써서 멋진 미스터리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감독은 이젠 없는 걸까.

미스터리, 혹은 속어로 whodunnit이나 ‘cloak and dagger(망토와 단검)‘라고도 통칭되는 추리물 또는 탐정물은 오래전부터 하나의 장르로 확고한 위상을 구축해왔다. 대개는 문학을 원작으로, 추리소설에서 가져온 명탐정을 그대로 영화에까지 연장한 작품들이 많았지만 물론 그렇지 않은 것도 적지 않다.

전자의 예로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셜록 홈즈와 에르퀼 포와로, 그리고 역시 크리스티가 창조한 노처녀 할머니 탐정 제인 마플이 등장하는 영화들이 있고, 이른바 하드보일드 혹은 느와르식 탐정들로 더실 해밋의 샘 스페이드,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 로스 맥도널드의 루 하퍼, 존 D 맥도널드의 트래비스 맥기 등이 있다.

홈즈는 워낙 오랜 세월동안 많은 배우들이 연기했지만 옛날 배우로는 30~40년대에 14편의 영화에서 홈즈역을 맡은 베이질 래스본이 가장 유명하고 드라큘라로 일세를 풍미한 크리스토퍼 리도 홈즈역을 맡은 적이 있다. 요즘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게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홈즈로 등장했고, TV 드라마에서는 영국의 젊은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배경을 현대로 옮겨 현대판 홈즈로 명성을 떨치고 있지만 옛날 배우들과는 달리 둘 다 깡마르고 키가 큰데다 모르핀을 흡입하면서 바이올린 연주를 즐기는 선병질적인 원작의 홈즈 이미지와는 완전 무관하다.

또 포와로 역시 일찍이 30년대부터 영화화돼 여러 배우들이 그 역할을 맡았지만 가장 유명한 건 피터 유스티노프다. 하지만 그는 몸집이 크고 뚱뚱해서 작은 몸집에 계란같이 둥근 대머리, 카이젤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마치 새 같은’ 인상을 주는 단정한 신사라는 포와로의 원작 이미지와는 그다지 맞지 않았으나 워낙 출중한 연기력으로 단점을 보완했다.

유스티노프를 제외하면 원작의 이미지와 가장 가까운 것은 ‘오리엔트 특급~’에 출연한 앨버트 피니였고, 최근 영화와 TV극에서 포와로역을 맡은 영국배우 데이비드 수쳇이야말로 최고 적역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런가 하면 미스 마플로는 왕년의 글래머배우 앤젤라 랜스버리가 유명하지만 그 역시 자그마한 시골 노부인이라는 원작 이미지와는 상당히 떨어져있다. 이에 비해 작은 몸매에 편안한 시골 할머니 같은 느낌을 주는 노장배우 헬렌 헤이스야말로 최고의 미스 마플이란 칭찬을 받았다.

하드보일드 탐정, 특히 샘 스페이드 등 해밋의 탐정들은 워낙 험프리 보가트가 맡아놓고 연기했고 때로 느와르의 거봉 로버트 미첨도 가세했는데 루 하퍼는 두 편의 영화에서 폴 뉴먼이 연기했다. 트래비스 맥기는 크리스천 베일이 그 역을 맡아 촬영할 예정이라고 한다.

물론 명탐정들이 등장하지 않는 멋진 추리영화들도 많다. 그중 하나가 명장 빌리 와일더가 만든 국내 제목 ‘정부(情婦)’, 다른 제목으로는 ‘검찰측 증인(Witness for the Prosecution, 1957)’이다. 애거서 크리스티 원작으로 말렌 디트리히와 찰스 로튼의 연기가 일품이었던 이 영화는 원작도 훌륭했지만 영화도 걸작으로 불려 전혀 손색이 없다.

또 ‘망각의 여로(또는 백색의 공포 Spellbound, 1945, 그레고리 펙, 잉그리드 버그먼)’ '‘현기증(Vertigo, 1958, 제임스 스튜어트, 킴 노박)'을 비롯한 히치콕의 영화들과 로만 폴란스키의 ‘차이나타운(1974, 잭 니콜슨, 페이 더나웨이)’, 그리고 브라이언 싱어의 ‘유주얼 서스펙트(Usual Suspect, 1995, 케빈 스페이시)' 등도 일급 whodunnit다.

이밖에 극장용 영화가 아니고 TV영화지만 도서추리(倒敍推理 누가 범인인지를 추리로 풀어가기보다 범인을 먼저 알려주고 어떻게 범인을 찾아가는지 그 과정을 묘사하는 형식)물로서는 거의 적수가 없는 ‘형사 콜롬보’ 시리즈도 결코 빼서는 안 될 탐정영화다.

머리를 쓰기보다 뭐든지 즉물적이고 단세포적인 볼거리에만 치중한 영화가 판치는 요즘 두뇌를 자극하는 품격 있는 멋진 추리영화, 탐정영화가 그립다.

김상온(프리랜서 영화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