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천생 배우였다. 돌아가시기 얼마전까지도 무대에 서고 싶어 하셨다.”
10일 원로배우 백성희(본명 이어순이) 선생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빈소를 찾은 후배 연극인들이 고인에 대한 추억을 묻는 질문에 한결같이 나온 대답이었다. 고인은 지난 8일 밤 노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91세.
이날 빈소에는 배우 이순재 박정자 강부자 변희봉 김금지 오영수 손숙 우상전 윤석화 김소희, 연출가 손진책 이윤택 이성열 정대경, 극작가 배삼식 등 고인과 함께 작업했거나 친분이 두터웠던 후배 연극인들 400여명이 다녀갔다. 김윤철 예술감독 등 국립극단 관계자들은 고인의 가족과 함께 빈소를 지켰다.
고인과 연극 3편에 함께 출연했다는 배우 박정자는 “선생님은 자존심이 정말 강한 분이었다. 평생 꼿꼿하셨고 열정이 대단하셨다”며 “그 연세까지 무대에 오른 배우가 세계에서 얼마나 되겠느냐”며 말했다. 또 재단법인 국립극단의 초대 예술감독으로 ‘백성희장민호극장’을 만든 연출가 손진책은 “선생님은 배우로서는 행복하고 명예로운 삶을 살다 가셨다. 연극 ‘3월의 눈’에 다시 출연하고 싶어 하셨는데,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해서 안타깝다”고 밝혔다.
‘3월의 눈’은 2011년 3월 백성희장민호극장 개관작으로 백성희와 장민호 두 원로배우에 대한 헌정의 의미를 담아 국립극단에서 제작한 작품이다. 고인은 초연 당시 장민호 선생과 호흡을 맞춘 뒤 2012년 공연에선 박근형, 2013년 공연에선 변희봉과 함께 출연했다. 국립극단 관계자들에 따르면 고인은 ‘3월의 눈’에 다시 출연하게 되면 연기하고 싶은 상대 배우로 30여살 아래의 배우 남명렬(57)을 꼽았다고 한다. 호리호리하고 지적인 모습이 초연 당시 호흡을 맞췄던 장민호 선생의 느낌과 비슷했기 때문이라는 게 국립극단 관계자들의 추측이다.
하지만 고인은 2013년 국립극단의 ‘3월의 눈’과 명동극장의 ‘바냐 아저씨’를 끝으로 다시는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당시 명동극장에서 ‘바냐 아저씨’를 기획했던 정명주 국립극단 팀장은 “사실 ‘바냐 아저씨’에 출연하셨을 때 초반에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공연을 하면 할수록 선생님이 오히려 기운을 더 차리셨다. 배우에겐 무대와 관객이 힘의 원천이라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고 회고했다.
2004년 고인의 연극인생 60주년을 기념하는 자전적 연극 ‘길’ 대본을 구성하고 썼던 연출가 이윤택은 “2014년 말 국립극단에서 ‘혜경궁 홍씨’를 공연할 때 선생님이 나를 호출했다. ‘길’을 다시 무대에 올리고 싶으니 준비해달라고 하셨는데, 결국 선생님 건강이 허락하지 않았다”면서 “솔직히 선생님이 이렇게 가실 줄 몰랐다. 그래서 올해 ‘벚꽃동산’을 올리면서 극중 여주인공인 라네프스카 부인이 보게 되는 ‘죽은 어머니의 환영’에 직접 선생님이 출연하시면 어떨까 생각했었다”고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었던 고인은 마지막으로 회고록 ‘백성희의 삶과 연극-연극의 정석’ 출간에 모든 힘을 쏟았다. 윤미경 국장은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기 서너달 전에 찾아뵈었을 때 무대에 설 수 없는 것을 슬퍼하셨다. 회고록이야말로 당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이었다고 말씀하셨다. 책이 나왔을 땐 무척 기뻐하시면서 건강도 다시 좋아지시는 듯 했다. 하지만 이후 기력이 급격히 떨어지셨다”고 설명했다.
한편 고인의 장례는 대한민국 연극인장으로 치러진다. 12일 오전 8시 30분 발인을 한뒤 오전 10시 용산구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영결식을 연다. 이후 오전 11시 중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손진책 전 국립극단 예술감독의 연출로 노제가 진행된다. 이날 노제에서는 이윤택이 쓴 조시(弔詩) ‘배우의 길을, 유일한 이 길을’을 안숙선 작창으로 부르게 된다. 또 가수 장사익은 고인이 출연했던 영화 ‘봄날은 간다’(2001)의 동명 주제가를 부를 예정이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
원로배우 백성희 빈소 풍경, 후배들 "선생은 천생 배우"
입력 2016-01-11 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