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온의 영화이야기] (52) 새해의 소망

입력 2016-01-05 09:17
LA CINEMATHEQUE FRANCAISE 홈페이지 캡처

바야흐로 영화 전성시대다. 지난해 영화 관람객수가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2억1517만여명. 그리고 상영영화 편수도 역시 사상 최고였다. 한국영화는 541편이 상영돼 그중 252편이 개봉작이었고, 외화는 2050편 상영에 1187편 개봉이었다. 관객 1인당 4.2편 꼴로 영화를 본 셈이다. 이는 단연 세계 최고수준이라고 한다. 천만 관객 돌파 영화도 한국영화 3편에 외화 1편 등 4편이나 됐다.

물론 이 같은 외형적 성공 이면에는 여러 문제점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예컨대 불균형적인 배급의 문제라든지, 흥행공식에만 충실한, 뻔하고 일률적인 내용의 영화들이 쏟아져 나옴으로써 다양성의 결여가 가속화되고 있다든지, 이와 관련해 관객의 편중현상도 심화돼 부익부 빈익빈의 이른바 흥행 양극화현상이 나타나면서 ‘중박(관객 1백만명 이상)’영화를 찾아보기 어려워졌다든지 하는 따위다.

그러나 그런 문제점들과는 별개로 영화 보기가 우리 국민의 활동 가운데 대단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만은 틀림없다. 마치 그 옛날 1950~60년대 문화적 토양이 척박하던 시절 영화가 거의 유일한 문화 향유수단이었던 때로 되돌아간 것 같다.

지금은 영화 말고도 볼거리, 즐길거리가 널려있는데도 영화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가 뭘까. 영화가 ‘장사’가 되는 것으로 입증됨에 따라 투자가 늘어 개봉작이 많이 늘어났기 때문이라는 등의 분석이 나오지만 이는 한국영화의 경우일 뿐 외화까지 포함하면 영화 관람이 하나의 소비습관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설득력을 지닌다.

실제로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우스개가 있다. “크리스마스에 뭐할까?” “레스토랑에서 밥 먹고 영화 보고 카페 가지” “그럼 자기 생일에는 뭐하지?” “레스토랑에서 밥 먹고 영화 보고 카페 가지” “돌아오는 우리 만남 100일 기념일에는?” “레스토랑에서 밥 먹고 영화 보고 카페 가자.”

하긴 영화구경처럼 만만한 소일거리 혹은 시간 때우기도 없다.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에서 영화관은 필수다. 영화 보기를 빼면 별로 할 일이 없다. 거기다 문화적 소양 쌓기에서 뒤떨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나아가 문화적 무식꾼 소리를 듣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증까지 곁들여지면 영화 보기는 결코 거를 수 없는 중대사가 된다.

여기에는 사회적인 풍조도 한 몫 거든다. 언제부턴가 영화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그 어느 때보다 널리 확산되면서 신문과 TV에서는 영화보기를 부추기는 영화관련 기사와 프로그램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개인적 영화평(이라기보다 영화관람 소감)이나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등 온갖 종류의 리스트처럼 대부분 진지하기보다는 표피적인 내용의 영화관련 책이 홍수를 이룬다.

그런가 하면 별의별 사람들이 다 영화평론가를 자처히며 PC와 SNS 등 발달된 개인통신망을 통해 영화이야기를 쓰고 실어 나른다. 다소 심하게 말해 영화(이야기)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을 지경이다.

이런 현상은 새해라고 그다지 달라질 것 같지 않다. 특히 한국영화건 외화건 줄줄이 대기하고 있는 새해 상영예정작들을 보면 오히려 더 영화구경 열풍이 불지도 모르겠다. 영화업계 등 관계자 입장에서는 호기다. 그렇다면 영화 애호가 입장에서 이런 호기를 맞아 절실히 바라는 소망이 있다. 고전영화만 상영하는 고전 전문영화관 개관이다.

고전의 중요성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모든 예술이 그렇듯 영화도 마찬가지다. 훌륭한 고전의 영향 아래 현대의 걸작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선진국치고 이런 상영관이 없는 나라가 없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미국 워싱턴 DC의 시네마테크와 뉴욕의 ‘필름 포럼’ 등은 역사와 전통이 있는 고전영화상영관들이다. 그중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프랑스에서 ‘누벨바그’가 생겨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 미국의 필름 포럼도 이른바 뉴욕파 영화작가들의 온상 노릇을 했다.

그러나 꼭 그래서만이 아니다. 고전영화 전문상영관은 영화학도들에게 더 없이 훌륭한 교실이지만 ‘요즘 영화’에 질린, 고전을 그리워하는 이들도 있게 마련이고 이들을 위해서라도 고전상영관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프랑스 미국 등에는 시네마테크 같은 ‘준공공기관’적 상영관만 있는 게 아니다. 파리 시내 곳곳에는 고전 걸작만 상영하는 작은 규모의 일반극장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미국에도 1922년에 개관한 샌프란시스코의 카스트로극장은 고전영화만 틀어준다. 이런 극장은 독일에도 있다. 베를린의 키노 인터내셔널(1977년 개관).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없다. ‘실버극장’이라는 이름의, 노인 관객들을 위한 옛날 영화(고전이 아닌) 상영관은 어쩌다 있지만 일반 관객을 상대로 한 고전영화관은 없다.

예술영화와 독립영화 상영을 위한 ‘서울 시네마테크’가 2018년 완공 목표로 건립이 추진되고 있고 한국영상자료원 산하에 시네마테크 KOFA가 있어 고전영화를 볼 수 있는 공간이 있긴 하지만 시네마테크 KOFA의 경우 한국영화 위주여서 고전 걸작 외화를 보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외에도 전국에 몇몇 예술영화 전문상영관이 있지만 대개 정부 지원금으로 연명하고 있어 문을 닫는 영화관이 속출하는 등 앞날이 불투명하다.

그래서는 안 된다. 고전영화 전문상영관도 정부 지원금에 기대지 말고 돈을 벌어 자립 운영돼야 한다. 그러려면 많은 관객을 끌어 모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이름부터 바꿀 필요가 있다. ‘다양성영화 전문상영관’ ‘예술영화 전문상영관’ 같은 이름은 일반인들을 주눅 들게 하기 십상이다.

‘다양성’이 뭔지 아리송하고, ‘예술영화’라는 것들이 얼마나 어렵고 지루하고 따분한지 잘 아는 사람들은 그 이름에서부터 겁을 먹고 외면하기 일쑤다. 그러니 정부 지원금이 없으면 존립이 어려울 수밖에.

사람들에게 친숙한 할리우드 영화들을 비롯해 옛날 고전 명작들을 연중 내내 상영하는 ‘고전 전문 극장’을 만듦으로써 일반인들을 끌어 모아야 한다. 그래서 누구라도 웃고 싶으면 언제든 우디 앨런이나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의 영화를 보러 가고, 일상의 서스펜스를 경험하고 싶으면 알프레드 히치콕의 스릴러를, 오랜만에 서부의 시정을 느끼고 싶으면 존 포드의 서부극들을, 그리고 프랑스식 감성을 느껴보려면 장 르누아르나 르네 클레망의 영화들을 보러갈 수 있어야 한다.

부디 새해에는 고전영화 전문영화관 개관이라는 ‘소박한’ 소망이 이뤄지면 좋겠다. 물론 있던 영화관들도 하나둘 사라지는 판에 고전영화 전문상영관이 새로 생기기를 바라는 건 헛된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그게 그토록 어렵다면 고전영화 전문 TV 채널이라도 하나 생겼으면.


김상온(프리랜서 영화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