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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수목원에서 만난 붉은 겨울 열매들. 원예용 낙상홍, 덜꿩나무, 산수유, 줄무늬낙상홍, 청미래덩굴, 가막살나무, 백당나무, 팥배나무, 괴불나무, 분재용 난쟁이감 / 작살나무의 보라색 열매 / 흰말채(붉은 수피)와 노란말채(노란 수피) 나무 / 산수유 고목 / 국립수목원 인근 숲에 서식하는 말똥가리(왼쪽)와 야생 원앙새 / 포천=구성찬 기자
풀은 지상에서 모습을 감추고, 나무에선 꽃도, 잎도, 열매도 거의 다 떨어지고 없는 계절이 왔다. 숲은 무성하게 키웠던 에너지를 땅에 되돌려 주고 새 봄을 준비한다. 지난 16일 찾은 경기 포천시 국립수목원에선 탐방객을 보기 어려웠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도 있겠지만, 보통 꽃이나 단풍에 열광하는 게 인지상정이기 때문에 이 절기에 숲을 찾는 발길은 뜸할 수밖에 없다. 광릉에서는 눈 덮인 전나무 숲도 장관이지만, 쌓일 정도의 큰 눈은 아직 더 기다려야 하나 보다.
◇ 광릉숲, 유네스코가 인정한 생물 다양성의 보고
국립수목원은 세조가 묻힌 광릉의 부속림(광릉숲) 한자락에 조성돼 있다. 광릉숲은 조선왕실에 의해 철저히 보호되고 전란과 사람 손을 피해 간 덕분에 200~300년 된 고목들이 지금도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울창하다. 광릉숲은 자생식물종이 983종, 동물서식종이 2826종, 천연기념물은 20종에 이르는 생물 다양성의 보고(寶庫)다. 그 덕에 2010년에는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됐다. 장수하늘소, 광릉요강꽃, 미선나무, 섬개야광나무 등 숱한 멸종위기종들이 잘 보호되고 있다. 국립수목원 연구기획팀 오승환 임업연구관과 김성식 전문위원이 수목원 탐방을 함께 했다. 오 연구관은 “탐방객이 가장 적은 시기이고, 일부 열매 빼고는 볼 것이 별로 없을 텐데…”라고 걱정했다.
일반인은 물론 어지간한 야생화나 나무 애호가들도 식물을 꽃 위주로 관찰한다. 그래서 꽃이 지고 나면 종을 식별하기도 어렵다. 그렇지만 꽃은 식물의 생식기에 해당한다. 식물 입장에서는 남의 생식기에만 열광하는 인간들이 얼마나 엽기적으로 보이겠는가. 그러니 가을철 씨앗을 퍼뜨린 후 긴 겨울동안 눈(芽)을 만들고, 그것을 틔워 이른 봄에 꽃과 잎을 돋아낼 준비를 하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 날개 달린 미식가들의 잔칫상과 봄의 전령
평소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관목(키 작은 나무)원에는 과연 아직 열매를 달고 있는 나무들이 있다. 낙상홍, 산수유, 가막살나무, 괴불나무, 백당나무, 덜꿩나무, 작살나무, 팥배나무 등이다. 다른 열매들 다 사라져 새들이 배고파질 때까지 기다려 뒤늦게 열매의 수분을 빼고 당도를 높이는 지공(遲攻·지각공격)파들이다. 특히 원예용(미국) 낙상홍은 멀리서 보면 단풍이 활활 타오르는 듯 많은 열매를 포도송이처럼 달고 있다. 가막살나무의 빨간 열매는 폭죽 터지듯 옆으로 퍼져 있다. 덜꿩나무 열매는 수분이 많이 빠져서 작아졌지만, 그래도 붉은 윤기를 잃지 않고 있다. 괴불나무는 두개씩 마주 보며 달려 있는 빨간 열매 모양이 개불알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꽃잎 조각이 옛날 어린아이들이 차고 다니던 괴불주머니라는 노리개와 비슷해서 지어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백당나무 열매는 석류 알처럼 뭉쳐 있다.
각양각색의 열매마다 거의 임자가 따로 있다. 김성식 전문위원이 설명했다. “주황색 팥배나무 열매의 씨앗은 되새 떼나 멧새가 주로 먹는다. 산수유는 직박구리가 좋아하고, 몸집이 작은 오목눈이와 박새들은 아그배나무와 낙상홍의 작고 빨간 열매, 그리고 작살나무의 앙증맞은 보라색 열매를 즐긴다. 황여새와 홍여새는 늦가을과 이른 봄에 향나무열매의 씨앗을 좋아한다. 콩새는 조그마한 참느릅나무 종자를 좋아한다.” 그래서 공원에 나무를 심거나 아파트 조경을 할 때 울음소리나 자태가 예쁜 새들을 초대하려면 그에 알맞은 수종을 선택해야 한다. 새들도 알고 보면 미식가다. 김 위원은 각종 감나무를 보더니 “작지만 당도가 높은 고욤나무(감나무 원종) 열매는 새들이 다 먹고 없고, 감나무의 떫고 큰 열매는 아직 남아 있다”고 말했다. 이 시절 관목원이 각양각색의 열매 뷔페가 차려진 새들의 낙원일 줄은 몰랐다.
봄을 맨 먼저 알리는 나무들의 겨울눈을 살펴본다. 딱총나무와 귀룽나무는 꽃은 4월말이나 5월에 피지만, 잎이 빨리 나므로 늦겨울에 가장 먼저 잎눈을 틔운다. 히어리, 풍년화, 생강나무, 올괴불나무, 길마가지나무 등은 일찌감치 꽃눈을 만든다. 이들 키 작은 나무는 큰 나무들이 잎을 틔우고 나면 햇빛을 잘 못 받아 생장·번식에 지장이 있으니까 그들의 잎이 나기 전을 노린다. 이른 봄 긴 꼬리 모양의 꽃을 주렁주렁 매다는 서어나무와 까치박달도 일찍 눈을 터뜨린다. 김 위원은 “이들은 꽃가루가 멀리 퍼지는 데 다른 나무 잎들이 방해가 되기 전에 꽃눈을 틔운다”고 말했다.
◇ 지켜야 할 숲의 과제, 통합관리와 풀뿌리 자율 탐방
‘소리정원’에 접어드니 새소리가 들린다. 인공으로 만든 흐르는 물 가장자리라서 새들이 목욕하러 온다고 한다. 박새나 오목눈이는 초본의 지상부가 사라지고 없는 여기 저기 흩어진 풀씨를 먹기 위해 찾아온다. 이곳의 흰말채나무와 노란말채나무는 관상용으로 심었다. 이들 나무 군락은 줄기가 각각 빨간색과 노란색이어서 꽃이 없는 시절에 훌륭한 경관을 만든다. 한국특산식물 400여종이 자라고 있는 희귀특산식물보전원에는 특히 고산지대와 울릉도 등에 서식하는 희귀종이 많다. 국립수목원은 죽엽산, 소리봉, 철마산에 둘러싸인 분지로 햇볕이 드는 시간이 짧은 편이어서 평균기온이 주변보다 3~4℃ 낮다. 오 박사는 “겨울철 영하 25도까지 기온이 내려가는 이곳은 위도가 높은 철원과 기온이 비슷하다”면서 “구상나무, 복수초, 만병초, 눈주목 등을 증식하기에 적합한 곳”이라고 밝혔다. 오박사는 겨울철에도 푸른 잎을 퍼뜨리고 있는 만병초를 보더니 “통통한 모양의 겨울눈이 꽃이 될 놈이고, 가느다랗고 적은 눈이 잎이 된다”고 말했다.
평소에 자주 가는 수목원내 전나무 숲 대신 산림생산기술연구소가 관할하는 조림지를 살펴봤다. 이곳에서도 오대산 월정사에서 종자를 가져 온 100년 안팎의 전나무들과 일본잎갈나무(오엽송), 잣나무들이 주종이다. 다만 최근에도 간벌을 해서 어린 나무들을 큰 나무 밑 사이사이에 심어 나무들의 굵기와 높이가 다양하다. 이곳 일대에는 최고 120년 묵은 것을 포함한 산수유 고목이 3그루 있다.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의 완충지대에 해당되는 이곳은 핵심지역인 소리봉과 수목원, 그리고 죽엽산 사이의 숲으로 산림청과 문화재청의국유림과 봉선사 소유의 사찰림으로 구성돼 있다.
언덕에서 문화재청 국유림 쪽을 보니 완전히 다른 자연림이다. 제멋대로 자란 서어나무, 졸참나무, 소나무들이 20m 높이까지 뻗어 있고, 당단풍 때죽나무 쪽동백 덜꿩나무 등의 관목들이 많다. 오 박사는 “이곳 주민들은 규제의 정도가 곳곳에 따라 다르다는 점에 불만이 있다”면서 “보전지역 전체를 한 곳에서 통합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국립수목원과 보전지역 중 미개방구간도 언젠가는 개방해야 할 것으로 본다”면서 “다만 지금처럼 탐방인원을 제한하되 지역주민들이 자율적으로 가이드탐방을 실시하도록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경북 울진군 금강소나무숲길과 왕피천 탐방로의 운영방식이다.
◇ 식물의 한해살이, 복잡한 그물망이 펼치는 드라마
나무인문학자인 강판권 박사는 사람들이 아직도 나무를 꽃의 상대말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특별시의 상징나무 은행나무와 상징 꽃 개나리가 사실은 모두 나무인데 “시목과 시화를 나눈 기준은 다분히 꽃의 화려함”이라고 그는 지적했다. 즉 각 지자체가 시목으로 설정한 나무들은 꽃이 화려하지 않거나 관찰하기 어렵다는 게 특징이다. 어떤 나무든 꽃을 피워야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꽃은 나무의 일부인데 사람들은 꽃이 나무의 전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꽃만 중요한 게 아니라 열매를 퍼뜨리기까지 식물의 1주기, 즉 라이프사이클을 계절별로 살펴보는 게 더 중요하다. 그러려면 어느 한 숲길을 정해 주, 절기, 혹은 달마다 다니면서 식물들을 관찰해 보는 게 좋다. 나는 올해 서울 서대문구 안산 자락길을 자주 다니면서 늘 궁금해 하던 한 나무가 여름철 독한 향기를 내뿜는 누리장나무라는 것을 꽃을 보고서야 알았다. 또 가을 늦게까지 빨간 꽃받침 속에 짙푸른 열매를 품는다는 것도 깨달았다. 식물의 한해살이 과정은 서로 다른 동·식물들과 경쟁하기도, 도움을 주고받기도 하는 복잡한 그물망이 펼치는 드라마다. 그런 관계 맺음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동식물과 생태계를 깊이 이해하고, 또 사랑하는 첩경이다. “봄이라고 꽃만 보지 마세요. 대지예술의 창시자는 이끼랍니다.” 신준환 동양대 교수가 국립수목원장 시절 페이스북에 올려 놓은 글이다.
포천=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 사진=구성찬 기자 ichthus@kmib.co.kr
[임항 논설위원의 ‘그 숲길 가보니’] 국립수목원에 차려진 울긋불긋 열매 뷔페, 새들의 아름다운 만찬
입력 2015-12-30 17:27 수정 2015-12-31 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