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온의 영화이야기] (51) 못다 핀 여배우들

입력 2016-01-05 09:44
르네 젤위거

지난번에 ‘못다 핀 남자배우’들 얘기를 했으니 이번에는 ‘못다 핀 여배우’ 또는 ‘스스로 영광의 권좌에서 내려온 여배우’ 얘기를 해보자.

한때의 화려했던 경력을 뒤로 하고 어느 샌가 쓸쓸히 잊혀져버린 여배우들을 거론하자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메그 라이언과 지나 데이비스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When Harry Met Sally, 1989)’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Sleepless in Seattle, 1993)’ ‘유브 갓 메일(You;ve Got Mail, 1998)’ 등에서 한없이 사랑스러운 여인을 연기해 한때 ‘로맨틱 코미디의 여왕’으로 불리며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여배우 중 한사람으로 군림했던 라이언이 이제까지 올린 흥행성적은 무려 8억7천만 달러. 그러나 거기에 최근작들은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았다.

이러한 라이언의 몰락은 무엇보다 제대로 된 후속작에 출연하지 못한데다 배우 데니스 퀘이드의 아내로서 러셀 크로우와 공공연히 염문을 뿌림으로써 편안한 이웃집 여인 같은 이미지가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린 데서 비롯됐다. 그리고 요즘 들어 그가 사람들이 알던 메그 라이언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비쳐진다는 게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 한마디로 과거의 귀엽고 사랑스럽던 매력을 깡그리 잃어버린 것이다.

데이비스는 수전 새런든과 공연한 페미니스트 영화 ‘델마와 루이스(1991)’의 델마역으로 가장 잘 알려진 배우다. 그러나 그에 앞서 ‘더 플라이(1986)’ ‘비틀쥬스(1988)’ 등에 출연해 명성을 쌓은데 이어 ‘우연한 방문객(Accidental Tourist)'으로 88년에는 아카데미 여우조연상까지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화려한 경력도 90년대 중반부터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당시 그의 남편이던 레니 할린 감독과 함께 많은 돈을 들여 만든 영화 ’컷 스로트 아일랜드‘와 ’롱 키스 굿나잇(이상 1996)‘이 형편없는 졸작이란 평을 받으면서 흥행에도 참패한 게 그 계기였다.

이후 거의 잊혀져가던 그는 2000년대 들어 TV를 통해 기사회생했다. TV 드라마 ’커맨더 인 치프‘에서 여자 대통령역을 맡아 2005년 골든 글로브 TV 시리즈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받은 것. 그는 이후로도 2014년 ’그레이 아나토미‘ 등 TV 출연을 계속해 오고 있지만 물론 과거의 성가는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다.

이 두 사람과는 다소 다르지만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기로는 마찬가지인 여배우들도 있다. 우선 피비 케이츠. 그는 1982년 ‘패러다이스’라는 영화로 데뷔했다. 이 영화에서 누드신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그는 귀엽고 깜찍한 얼굴에 청순하면서도 동시에 섹시한 모습으로 80년대에 엄청난 인기를 끌어 우리나라에서까지 10대 청소년들의 우상으로, 그래서 학생들의 책받침에 새겨지곤 하는 ‘여신급 여배우’로 이름을 떨쳤다.

그가 이처럼 한국 같은 동양권에서까지 큰 인기를 끈 것은 어쩌면 그의 몸에 동양인의 피가 흐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의 친가는 유대계 러시아인이지만 외할아버지는 중국계 필리핀사람이기 때문. 어쨌거나 그는 1994년 31살의 한창 나이에 은퇴를 선언하고 스크린에서 모습을 감췄다. 아이들 양육에 전념하기 위해서라는 게 이유였다. 그는 1989년 17살이나 많은 배우 케빈 클라인과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다. 지금은 뉴욕 매디슨가에 ‘블루 트리’라는 부티크를 내고 거기에 전념하고 있다고 한다.

그 다음은 르네 젤위거다. 사랑스런 코미디 ‘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와 뮤지컬 ‘시카고(2002)’를 통해 스타덤에 오른 뒤 2004년 ‘콜드 마운틴’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그는 200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 아이콘의 한사람으로서 2007년에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출연료를 많이 받는 여배우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콜드 마운틴’ 이후 그의 인기는 곧 시들기 시작해 결국 그는 5년간의 은둔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가 처지가 비슷한 다른 여배우들과 다른 점이라면 그대로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 키아누 리브스와 공연한 스릴러 ‘완전한 진실(The Whole Truth)’이 이미 제작 완료돼 개봉을 기다리고 있을 뿐 아니라 2016년에는 ‘브리짓 존스’ 3편인 ‘브리짓 존스의 아기(Bridget Jones's Baby)’도 나오리라는 소식이다.

또 이들보다 한참 앞서서 명성의 한복판에서 스스로 걸어 내려온 여배우들도 있다. 그레이스 켈리와 그레타 가르보다. 켈리는 모나코의 왕비가 되기 위해 가장 인기가 높았을 때 배우경력을 접었다. 1956년 26살에 모나코의 레이니에 3세와 결혼해 평민에서 일약 왕비가 된 것.

1950년에 데뷔해 23살 때인 1953년 클라크 게이블과 공연한 ‘모감보’로 스타덤에 오른 후 불과 3년 동안 ‘이창(Rear Window, 1954, 제임스 스튜어트) 등 히치콕의 영화 3편을 비롯해 ‘하이 눈(1952, 게리 쿠퍼)’ ‘갈채(The Country Girl, 1954, 빙 크로스비)’ ‘상류사회(High Society, 1956, 빙 크로스비)’ 등 명작들을 남긴 그는 특히 ‘갈채’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할리우드의 아이콘으로 떠올랐으나 결혼을 위해 과감하게 스크린을 떠났다.

그러나 그레타 가르보는 켈리와는 또 달랐다. 켈리는 결혼이라는 ‘핑계’라도 있었지만 가르보는 그마저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인기의 절정에서 스스로 은둔자의 길로 들어섰다.

스웨덴 출신으로 ‘차가운 북구 미녀’의 대명사였던 가르보는 1925년 할리우드로 건너와 무성영화에서부터 시작해 1920~30년대를 주름잡았다. 그가 처음 출연한 유성영화 ‘안나 크리스티(1930)’의 광고카피는 “가르보가 말한다”였고 한때의 슬럼프를 딛고 다시 일어섰던 재기작 ‘니노치카(1939)’의 카피는 “가르보가 웃는다”였다. 가르보는 이후 1941년 마지막 작품 ‘두 얼굴의 여인(Two-Faced Woman)'이 저조한 성적을 내자 35살의 젊은 나이에 은퇴했다.

그리고 그 후 일절 외부에 모습을 공개하거나 심지어 집 밖에 잘 나타나지도 않은 채 1990년 8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 50년대에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 듯 과거에 젖어 사는 흘러간 대스타역을 해달라는 제의를 끈질기게 받았지만-영화 ‘선셋대로’에서 글로리아 스완슨이 맡았던 배역이다-끝까지 거절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 결과 그는 할리우드 최고의 ‘전설’로 남았다.


김상온(프리랜서 영화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