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없는 필리핀 중부의 작은 섬에선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을까. 빗물식수설치 사업을 진행 중인 전국재해구호협회와 지난 18~20일 지비팅길섬을 찾았다. ‘물’ 귀한 줄 모르는 우리와 달리 그들에게 ‘물’은 더없이 소중했다.
약 250페소(한화 6000원가량)로 양파, 토마토, 양배추와 쌀 1.5㎏ 등을 샀다. 한 가족이 두 번 식사를 할 수 있는 양이었다. 저녁과 아침식사 값을 내고 하룻밤을 함께 보낼 셈이었다. 영어를 할 수 있는 아이가 있는 집을 찾아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부탁했다. 물 때문에 힘들어하는 삶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고 했다. 노노이(37)·수잔(35·여) 부부가 흔쾌히 그들의 방 한쪽을 내줬다. 큰 딸 로산나(12·여)가 학교에서 배운 영어로 하루 지내도 괜찮다고 답했다.
‘3일 된 빗물’로 저녁식사
오후 4시쯤 짐을 풀었다. 아이 여섯 명까지 모두 여덟 식구가 지내는 집이었다. 마당에는 2년 전 태풍 하이옌이 들이닥쳤을 때 부러진 나무가 서 있었다. 나무에는 빨랫줄이 걸려 있었다. 태풍이 할퀴고 가도, 물이 없어도 어렸을 때부터 살아온 섬을 하루아침에 나갈 수 없다고 했다. 집은 크게 구역으로 나뉜다. 식구들이 잠을 자는 10평 남짓한 방과 5평 정도의 부엌, 그리고 화장실. 잠자는 방은 시멘트로 지어졌고, 나머지는 나무로 만들었다. 마당에는 1m 높이의 파란색 물탱크와 20ℓ짜리 물통 20여개가 놓여있었다.
오후 5시 30분이 되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둘째 라이언(10)이 부엌에서 1ℓ짜리 물통과 쌀이 담긴 그릇을 들고 나왔다. 마당에 있는 자기 키만한 파란색 통에서 물을 펐다. 오늘 내린 빗물이냐고 물어보자 3일 전 내린 빗물이라고 했다. 쌀뜨물은 마당에 있는 화분에 부었다. 양배추 등 야채도 이 물로 씻었다. 큰 딸이 씻은 채소로 어머니가 반찬을 만들고 아버지는 쪼그리고 앉아 땔감에 부채질을 하며 밥을 지었다.
조안나(7·여)와 이지미(6·여)는 외지사람이 신기했는지 식사시간 내내 눈이 마주치면 웃었다. 로버트(4)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나무로 만든 긴 의자에 누웠다. 어머니는 막내 기트(1)를 식탁 위에 앉혀놓고 숟가락으로 밥을 퍼서 먹였다. 기트가 밥을 다 먹었을 때쯤 컵에 물을 따라 아이 입에 가져다 댔다. 로산나가 식수라고 퍼온 것도 3일 전 받아둔 빗물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아이들은 밥을 먹은 접시에 물을 부어 마셨다. 그리고 그 접시에 남은 물로 입을 닦고 손을 씻었다. 접시를 한번 헹군 뒤 어머니에게 접시를 넘겼다. 설거지는 로산나의 몫이었다.
먼저 빗물을 대야에 부었다. 손등이 겨우 담길 정도였다. 로산나는 익숙했다. 대야 바닥에 잠긴 물을 퍼 올리듯 하며 접시를 헹궜다. 하나씩 세제를 묻혀 한쪽에 쌓았다. 대야 안 물은 이미 누런색이었다. 다시 빗물을 퍼와 대야에 손등 높이로 물을 부었다. 세제를 묻힌 접시들을 새 빗물에 헹궜다. 설거지를 마친 대야 속의 물은 다시 더러워졌다. 대야에 담겼던 물은 두 번 모두 마당의 화분으로 향했다.
오후 6시40분이 되자 완전히 캄캄해졌다. 하늘이 흐려 별은 보이지 않았다. 바다 건너 마을과 낚시 중인 배에서만 불빛이 비쳤다. 아이들은 마당에서 자기들끼리 놀았다. 저녁엔 따로 씻지 않았다. 이 마을사람들은 ‘저녁에 씻으면 다음날 열이 나 아프다’는 말을 하곤 한다. 물을 아끼기 위해서라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고, 급격한 기온 차이 때문에 저녁 샤워가 좋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이옌, 그 날의 기억
“욜란다가 다 먹어버렸어요. 과일도, 집도, 크리스마스까지도”. 저녁 식사를 마치고 마당에 모여 앉아 섬 생활에 대해 묻자 어머니가 ‘욜란다’ 얘기를 시작했다. 욜란다는 2년 전 필리핀을 강타한 태풍 하이옌의 필리핀 이름이다. 전기가 없어 휴대용 손전등을 하나 켜뒀다.
전날 기상 예보를 듣고 태풍이 오는 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다고 했다. 오전 4시부터 비바람이 불기 시작해 오전 8시가 되자 점점 강해졌다. 부부는 아이들을 데리고 섬 중턱으로 대피했다. 오전 9시가 되자 바람이 갑자기 멈췄다고 했다. 태풍이 지나간 줄 알고 다시 집으로 내려왔다. 그 때였다. 이번에는 반대쪽에서 더 거센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물은 어떻게 했냐고 묻자, “물이 문제가 아니다. 정말 이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다”고 했다. 다행이 이 섬에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다른 지역에서 쓸려 온 시체들이 바다 위에 둥둥 떠 있었고, 강한 파도에 섬의 절벽에 부딪친 물고기들이 붙어있었다고 했다. 바나나 나무도 다 날아가고 집도 날아가 버렸다. 눈앞에 모든 것이 사라지자 바다 건너 다른 섬까지 보였다고 했다. 욜란다는 2년 전 11월에 왔다. 그 해에는 크리스마스를 즐길 수 없었다고 했다.
섬 마을의 아침
오전 5시 닭 울음소리에 눈을 떴다. 고개를 들어 보니 부부는 이미 방에 없었다. 빗물로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새벽 잠결에 빗소리를 들었다. 라이언이 집 주변을 한 바퀴 돌며 물통의 물을 확인했다. 화장실 옆에는 냉장고가 누워있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담을 수 있는 위치였다.
오전 7시40분쯤 아침밥을 먹기 시작했다. 건강이 걱정되기도 했고, 물을 얻어먹는 게 부담스럽기도 해 물은 마시지 않았다. 아침식사를 하고 나서 어머니는 빗물로 빨래를 해 널었다. 로산나는 막내 기트를 씻겨주었다.
오전 9시 아이들과 같이 학교로 향했다.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큰 딸에게 커서도 이 섬에서 살고 싶으냐고 물었다. “굳이 나가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계속 살던 곳인데요.” 아이들이 태풍으로 무너진 집들을 지나 학교로 향했다.
사진·글(필리핀)=김판 기자 pan@kmib.co.kr
[르포] “3일 된 빗물로 저녁식사” 물 없는 필리핀 섬 마을의 하룻밤
입력 2015-12-22 17:54 수정 2015-12-22 17: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