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온의 영화이야기] (50) 못 다 핀 배우들

입력 2015-12-21 09:29 수정 2016-01-05 09:30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한 장면. 비오는 날 오드리 헵번과 조지 페퍼드와의 입맞춤 모습이다.

TV에서 옛날 영화를 봤다. ‘빛나는 여배우 특집’이라는 기획 타이틀이 붙은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 1961)’이었다. 워낙 유명한 클래식이라 내용은 새삼 소개할 것도 없거니와 다만 특집 제목답게 주연 여배우 오드리 헵번의 ‘찬란한 매혹적인 아름다움’은 아무리 감탄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그야말로 ‘오드리 헵번을 위한, 오드리 헵번의 영화’였다.

그러나 몇 번째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지만 이 영화를 또 다시 보면서 이번에 눈길이 간 건 오드리 헵번이 아니고 남자주연 조지 페퍼드였다. 전에는 무심코 지나쳤으나 새삼 주목한 페퍼드는 참으로 잘 생긴 배우였다.

내로라하는 미남이 넘쳐나는 할리우드지만 영화가 나올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페퍼드는 확 눈에 띄었다. 푸른 눈에 금발, 소년 같은 동안에 우아한 매너, 스포츠맨 같은 균형 잡힌 몸집까지 그런 꽃미남이 없었다. 마치 그를 둘러싸고 후광이 환하게 빛나는 듯 했다. 어쩌면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빛나는 남배우’ 특집으로 잡았어도 괜찮을 정도였다.

당시 영화 관객들도 그렇게 느꼈는지 이 영화를 통해 스타덤에 올라선 페퍼드는 ‘60년대의 앨런 래드’라는 평을 들으면서 당시 가장 유망한 젊은 배우로 꼽혔다. 그러나 이러한 장밋빛 전망을 뒤로 하고 그는 채 피지도 못한 채 져버렸다. 안타깝게도 뒤를 받쳐줄 후속작이 없었기 때문이다.

1차대전 당시 명예욕과 출세욕에 사로잡힌 하층계급 출신의 독일군 전투기 조종사를 냉혹하게 연기한 ‘대야망(Blue Max, 1966) 정도를 제외하면 그저 그렇고 그런 영화들뿐이었다.

거기다 그는 나중에 존 트라볼타와 톰 크루즈가 심취한 일종의 유사종교인 사이언톨로지교에 일찌감치 빠진 데다 알콜 중독에도 시달렸다. 그리고 촬영현장에서 다른 캐스트나 스태프들과 자주 충돌을 빚은 까칠하고 까다로운 성격도 그의 몰락을 부추겼다. 결국 그는 경력 초기의 그 찬란했던 영광을 살리지 못한 채 시들어버렸다.

그나마 말년에 TV로 방향을 전환하면서 최소한의 체면을 살리긴 했다. 꽤 인기를 끌었던 TV드라마 ‘A 특공대’의 한니발 대장역으로 기사회생한 것. 이후 그는 새롭게 1940년대를 배경으로 한 형사드라마를 준비하던 중 1994년에 세상을 떠났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환하게 빛나던 젊은 페퍼드를 떠올리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하긴 이처럼 잘 나가는 듯하다가 속절없이 스러져간 배우들은 또 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스티븐 보이드. 찰턴 헤스턴 주연의 ‘벤허(Ben Hur, 1959)’에서 벤허의 어릴 적 친구 메살라역을 맡아 명성을 떨친 그 배우다.

북아일랜드 출신인 그는 데뷔 초 커크 더글러스와 비슷하게 특징적인 턱의 보조개를 비롯해 잘생긴 얼굴에 넘치는 남성적 매력으로 ‘새 (클라크) 게이블’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특히 벤허의 메살라역은 어찌나 그에게 잘 맞았던지 “로마군 장군 갑옷은 보이드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덕분에 그는 역시 로마시대를 다룬 안소니 만 감독의 ‘로마제국의 멸망(The Fall of the Roman Empire,1964)'의 주인공으로 발탁됐고,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타이틀 롤을 맡은 대형 사극 ‘클레오파트라’에도 마크 안토니역으로 뽑혔으나 테일러가 앓아눕는 바람에 영화제작이 연기됨에 따라 하차하기도 했다(이 역은 나중에 리처드 버튼에게 돌아갔다).

그는 이후 좋은 배역을 얻지 못했으나 그래도 1960년대 후반까지 톱스타 지위를 누렸다. 그래서 1965년에 제작된 ‘징기스칸’에서는 조연이었음에도 타이틀 롤을 맡은 오마 샤리프를 제치고 이름이 먼저 소개되는가 하면 출연료도 더 많이 받아 비위가 상한 샤리프와 자주 다투곤 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이후 보이드의 인기는 급격히 하락해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B급 영화에 출연하다 1977년 46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초기의 화려한 경력에 비하면 참으로 씁쓸한 말년이었다.

이외에도 페퍼드나 보이드와 비슷한 길을 걸은 불운의 배우들로는 엘리어트 굴드와 라이언 오닐, 그리고 리처드 라운드트리가 있다. 로버트 올트먼 감독의 전쟁 코미디 ‘매쉬(MASH, 1970)’에서 자유분방한 군의관을 연기해 이름을 떨친 굴드는 70년대 초 ‘가장 촉망받는 배우’ 중 하나로 꼽혔다.

이와 관련해 당시 그가 사립탐정 필립 말로 역을 맡아 앞선 영화들에서 말로역을 했던 험프리 보가트나 로버트 미첨과 전혀 다르게 멋지게 연기한 레이먼드 챈들러 원작, 로버트 올트먼 연출의 ‘기나 긴 이별(The Long Goodbye, 1973)’은 지금도 걸작으로 꼽힌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다음부터는 내리막길이 시작됐다. 지금은 주로 간간이 TV드라마에 얼굴을 비치는 것으로 소일하고 있을 뿐인데 ‘매쉬’에 단짝 동료 군의관으로 같이 출연했던, 그러나 굴드와 달리 아직까지 왕성한 활동을 펼치면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도널드 서덜랜드에 비하면 특히 안타깝다.

오닐은 뭐니 뭐니 해도 에릭 시걸 원작의 대히트작 ‘러브 스토리(1970)’의 하버드 대학생 올리버역으로 기억되는 배우다. TV 멜로드라마 ‘페이톤 플레이스(1964~1969)’에서 미아 패로와 커플을 이뤄 인기를 얻은 뒤 올리버로 발탁돼 한순간에 톱스타가 된 오닐은 1973년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이어 그해의 흥행배우 2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배리 린든(1975)’ 같은 몇몇 영화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영화에 출연하지 못한 채 1970년대 말부터 내리막길로 접어든 끝에 스크린에서 사라졌다. 이런 그의 몰락 원인을 놓고 그의 에이전트는 그가 너무 멋진 사나이라서 다른 남자 배우들의 시기와 질투를 샀기 때문이라는 희한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라운드트리는 아카데미상을 받은 아이작 헤이스의 주제음악이 일품이었던 ‘샤프트(Shaft, 1971)’의 주연을 맡아 ‘최초의 흑인 액션배우’ 타이틀을 받았던 배우다. 그때까지 스타급 흑인배우로는 시드니 포이티어가 있었지만 액션배우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런 판에 라운드트리를 통해 그제야 비로소 클린트 이스트우드나 버트 레이놀즈, 찰스 브론슨 같은 백인 액션배우들에 필적할 흑인 액션배우가 나온 것이다.

꼭 그런 의미를 떠나서라도 터프하면서도 스타일리시한 사립탐정 샤프트를 연기한 라운드트리는 정말 멋졌다. 그 당시는 물론이고 2000년에 이 영화가 리메이크됐을 때 라운드트리는 주인공 샤프트의 삼촌인 존 샤프트역으로 카메오 출연했는데 나이가 든 모습이었음에도 주연 새뮤얼 잭슨을 압도할 만큼 멋있었다.

그러나 라운드트리 역시 72년과 73년에 만들어진 두편의 샤프트 속편을 빼고는 잡다한 영화에서 전형적인 흑인 조연 역할에 만족해야 했다. 그가 시절만 잘 타고났다면 요즘 각광받고 있는 덴젤 워싱턴이나 제이미 폭스 못지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어쨌거나 이런 배우들을 보면 배우로 성공한다는 게 생김새나 연기력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다 ‘팔자’려니….

김상온(프리랜서 영화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