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연말이 다가왔다. 북반구에서 살아가는 운명이라 연말은 항상 추운 겨울이게 마련이고 그래서 몸은 물론 마음까지 춥고 스산해진다.
물론 물리적인 추위 뿐만 아니라 올해도 아무 한 일 없이 한 해를 그냥 보내버렸구나 하는 회한과 자책 때문에 마음이 공허하고 허무해지는 탓도 있으리라. 그러다보니 가슴을 따스하게 데워줄 뭔가가 그리워지고 그 방편 중 하나가 가슴 따뜻해지는 영화라도 하나 찾아보는 게 아닐까 싶다.
요즘 ‘크리스마스 영화’나 ‘연말 영화’라면 크리스마스 시즌에 죽도록 고생하는 브루스 윌리스의 코믹 액션 ‘다이 하드’나 매컬리 컬킨의 ‘나홀로 집에’, 또는 영국 배우들이 총출동한 옴니버스 스타일의 ‘러브 액추얼리’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겠지만 나에게 최고의 ‘성탄 영화’ ‘세밑 영화’는 따로 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와 ‘멋진 인생(It's a Wonderful Life)’이다. 가슴이 뭉클해지고 코끝이 찡해지면서 눈가가 촉촉해지는 영화들.
마이클 커티즈 감독이 만든 1954년작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뮤지컬 코미디다. 영화도 영화지만 영화에서 불려진 같은 제목의 캐롤-대중음악 역사상 최고 히트곡-로 더 유명하다.
어빙 벌린이 작곡한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원래 1942년에 만들어진 빙 크로스비, 프레드 아스테어 주연의 뮤지컬 영화 ‘홀리데이 인’에 처음 삽입됐지만 같은 주연배우(빙 크로스비)를 써서 비슷하게 리메이크한 이 영화를 통해 더욱 널리 알려졌다.
영화의 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2차대전에 참전했다가 이제는 연예인으로 성공한 두 친구가 전쟁 당시 부하들을 훌륭하게 지휘해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사단장이 퇴역 후 미국 시골에서 작은 호텔을 어렵게 운영하고 있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된다.
두 사람은 궁리 끝에 크리스마스에 맞춰 옛 전우들을 불러 모아 호텔에서 멋진 쇼를 성대하게 공연함으로써 옛 상관을 도와준다. 영화는 이런 스토리에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양념으로 섞어 넣었다.
줄거리는 그 정도지만 출연진이 화려하다. 우선 저음 남성 발라드가수를 뜻하는 크루너(crooner)의 전설로 일세를 풍미한 빙 크로스비와 코미디언 겸 배우 겸 가수 겸 댄서로서 초대 유니세프(UNICEF) 친선대사로 활동하기도 했던 만능연예인 대니 케이가 두 주인공이고, 상대역으로 가수 겸 배우 로즈매리 클루니(배우 조지 클루니의 고모)와 귀여운 댄스 요정 베라 엘렌이 출연해 감미롭고 따뜻한 노래와 현란한 춤을 펼쳐 보인다.
거기에 명곡 ‘화이트 크리스마스’까지 곁들여지니 크리스마스 시즌에 보기에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뮤지컬이다. 남녀노소 누구나 볼 수 있는 등급이지만 애들 취향인 '다이 하드‘나 ’나홀로 집에‘류와는 달리 기본적으로 ’어른 영화‘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맞아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어른들이 보면 좋을 영화다.
1946년에 만들어진 ‘멋진 인생’은 어떤가. ‘어느날 밤에 생긴 일(It Happened One Night, 1934)’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Mr. Smith Goes To Washington 1939)’ ‘주머니에 가득한 기적(Pocketful of Miracles, 1961)’ 등 주옥같은 명화들을 만들어내 ‘카프라스러운(Capraesque: 대책없이 낙관적이고 희망적인)’이라는 단어를 영어사전에 등재시킬 정도였던 명감독 프랭크 카프라가 스스로 자신이 만든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고 했던 이 영화는 또한 미국을 대표하는 명우 제임스 스튜어트의 대표작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미국의 작가 필립 반 도렌 스턴이 1939년에 발표한 단편 ‘가장 위대한 선물(The Greatest Gift)’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천사가 등장하는 등 기본적으로 기독교적 세계관을 깔고 있지만 기독교신자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감동과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줄거리는 이렇다. 미국의 한 작은 마을에서 금융업을 하고 있는 조지 베일리(제임스 스튜어트)는 단란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선량하고 친절한 미국 시민의 표본이다. 그런 베일리가 궁지에 몰린다. 삼촌이 실수로 회사의 돈을 잃어버린 탓이다.
고민 끝에 크리스마스에 자살을 결심한 베일리 앞에 수호천사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가 태어나지 않았을 경우의 세상을 보여준다. 베일리의 눈앞에 펼쳐진 ‘베일리 없는 세상’은 끔찍하다. 그가 구해주지 못한 동생은 물에 빠져 죽고, 아내는 흉한 노처녀로 늙어간다. 마을은 고리대금업자 포터의 손아귀에 들어가 소돔과 고모라처럼 변해있다.
아무리 자신이 변변치 않고, 사는 게 힘들어도 살아가는 이유가 있다는 걸 깨달은 베일리는 다시 살아갈 의욕을 되찾고 마을사람들의 십시일반 도움으로 회사 공금도 다시 마련한다. 누가 뭐래도 자신의 삶은 ‘멋진 인생’인 것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두 영화 모두 너무 달달하지만, 즉 지나치게 휴머니즘과 센티멘털리즘에 함몰돼 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영화를 통해 이 신산(辛酸)한 현실의 삶을 잠시나마 위로받을 수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이 또 어디 있을까.
그렇지 않아도 힐링이니 위안이니 하는 말들이 싸구려 사랑 타령처럼 넘쳐나는 이때에. 비록 두 영화 모두 ‘옛날 영화’들이지만 요즘 사람들이 봐도 하나도 어색하거나 이상하지 않다. 국내에 DVD로 출시돼있는 만큼 아직 이 영화들을 보지 않은 이들은 올 연말에는 꼭 한번 찾아보기를 강추한다.
김상온(프리랜서 영화라이터)
[김상온의 영화이야기](49) '연말 영화' 보기
입력 2015-12-14 15:36 수정 2016-01-05 09: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