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확산 위기가 고조됐던 지난 5~7월, 감염병 대응에 관한 기획기사를 준비하는 기자에게 여러 감염병 전문가가 이런 얘기를 했다.
“미국에는 감염병 관련 고도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갖춘 질병예방통제센터(CDC)가 있습니다.”
CDC는 우리나라의 질병관리본부와 비슷한 미국의 정부기관이다. 감염병 확산 위기에 대응할 뿐 아니라 만성질환 관리도 한다. CDC는 지난 6월 메르스 대응을 돕기 위해 우리나라에 전문가를 파견했다. 새로운 감염병 대응체계 구축에 관한 조언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존재가 부각되면서 감염병에 관해 우리가 꼭 벤치마킹해야할 대상인 것처럼 자리를 잡았다.
한국언론진흥재단 디플로마 과정을 통해 지난달 16일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위치한 CDC 본부를 방문했다. 17~18일에는 노스캐롤라이나 주 정부 보건사회복지부의 감염병 담당 공무원들과 노스캐롤라이나 대학병원의 위기대응 담당 직원을 만났다. 이들과의 면담을 통해 “우리가 CDC를 똑같이 벤치마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의 감염병 대응 체계는 나름의 경험이 쌓인 그들의 체계였다. 수십년 이상 그들만의 소통과 작업 방식을 통해 만들어온 체계를 그대로 ‘수입’해오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미국에 메르스 사태가 일어난다면
미국에서 메르스가 확산된다면 우리처럼 2주 동안 환자가 입원했던 병원 이름이 숨겨지는 일이 일어날까. 흥미로운 건 이번 방문에서 누구도 병원명 공개에 대한 법 규정을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모든 기관에서 “감염병 발생시 병원명 공개는 상식”이라고 입을 모았지만 ‘누가 병원명을 공개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서로 미룬다는 인상을 받았다.
CDC의 리스크 커뮤니케이션 담당자인 데이비스 데이글은 “우리가 병원명을 공개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는 “메르스 사태 때 한국에서 2주 동안 비밀이 지켜진 것은 놀라웠다”고 하면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CDC)가 병원명을 공개하지 않는다. 병원에서 정보를 공개한다. 병원에서 숨기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노스캐롤라이나 대학병원 관계자들은 스스로 병원명을 공개하는 것에 대해 부담을 나타냈다. 이 병원 ‘위기준비와 계획위원회’ 소속인 달튼 소이어는 “병원이 직접 정보를 공개하기보다 먼저 주 정부에 보고하고 주 정부가 이를 공개하는게 바람직하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렇다면 주 정부는 병원명을 공개하는 데 적극적일까. 노스캐롤라이나주 주도인 롤리에서 만난 주 정부 관계자들도 ‘우리가 병원 이름을 알린다’고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들은 마치 수건을 돌리듯 “병원 공개는 다른 곳에서 하는게 좋다”고 했다. 미국은 감염병 사태시 병원 이름 공개에 대해 명확한 주체도, 규정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제 사태에서 미국은 매우 기민하게 움직였다. 지난해 에볼라 환자가 에모리 대학 병원으로 후송을 앞두고 있을 때 가장 먼저 발표한 것은 병원 측이었다. CNN도 관련 기관과 병원 6곳에 전화 취재를 해 에모리 대학병원으로 환자가 후송될 것을 알고 보도를 준비하고 있었다. 데브라 골드슈미트 CNN 건강·의학 뉴스 에디터는 “언론이 보도하지 않았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병원 이름이 공개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미국의 감염병 대응 체계가 엄격한 법적·제도적 장치에 의해서만 움직이는게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감염병 발생시 병원이 이를 보건 당국에 신고하지 않을 경우 병원에 가해지는 처벌 규정도 없다.
그들의 말대로 감염병 상황에서 병원명 공개는 상식적인 일이었다. 그들은 그러한 정보는 숨길 수 없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듯 보였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병원의 홍보 담당자는 “정보를 숨기는게 오히려 나중에 불이익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우리가 감염병 발생시 의무적으로 병원 이름을 공개하도록 법을 바꾼다고 해서 감염병에 대한 대응 능력이 곧바로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해준다. 미국의 감염병 대응 체계는 오랜 기간 경험에 의해 체화된 상식과 평상시의 교육, 훈련, 연습 등에 의해 구축된 것이었다. 이러한 종류의 집단대응 능력은 기계적으로 벤치마킹한다고 바로 우리 것이 되기 어렵다.
CDC의 독립성 vs. 질병관리본부의 독립성
국내에서 CDC에 관해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전문성’과 ‘독립성’이었다. 그런데 현지 방문에서는 CDC의 전문성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낯선 외부인에게 많은 걸 공개하기 원하지 않는 듯 했다.
CDC 방문 전 국내에서 만난 이상윤 ‘건강과 대안’ 연구위원이 CDC의 전문성에 대해 더 자세히 들려줬다. 그는 “CDC는 직원이 8600여명인 거대 조직이며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전문성으로 주 정부의 감염병 관리에 개입을 한다”고 했다. 8600여명 가운데 2000~3000명은 세계 각지에 나가 있거나 미국 내 각 주에 파견돼 있다고 한다. 전체 예산 가운데 감염병 관련 예산이 차지하는 3분의 1 정도(68억 달러 가운데 22억9000만 달러(약 2조7000억원·2014년 기준)다. 다른 나라의 비슷한 조직에 비해 감염병 예산 비중이 더 크다. 국가 안보 차원에서 감염병에 접근하기 때문이라는게 이 연구위원의 설명이다. CDC는 1946년 설립됐다.
전문성은 인정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CDC의 독립성은 무엇을 의미할까. 국내에서 질병관리본부의 독립성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보건복지부로부터의 독립을 뜻했다. 전문가 조직인 질병관리본부 직원들이 관료 조직인 복지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일하게 하자는 차원이었다.
CDC 역시 연방정부 산하의 기관이다. 그런데 CDC 관계자들을 직접 만나 보니 그들이 연방정부로부터의 독립을 뜻하는 독립성을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CDC는 어떤 사태가 자체 감당 능력을 초과하는 단계에 이르렀을 때 비상조직센터(EOC·Emergency Organization Center)를 가동한다. EOC의 가동 권한은 CDC의 센터장에게 있다. 하지만 그들 역시 EOC에서 연방정부의 보건사회부, 국토안보부로 이어지는 보고 라인을 갖고 있다. 위기관리 부서의 에드워드 루즈는 “어떤 정책 결정 조치는 담당 정부 조직에서 한다. 물론 우리의 권고를 적극적으로 참조한다. 권고를 정부 조직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노스캐롤라이나주 정부 관계자들도 감염병이나 재난에서의 대응 권한은 주 정부에 있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메건 데이비스 주 감염병 국장은 “격리나 검역, 예방조치부터 경찰을 동원하는 권한까지도 주 정부의 몫”이라며 “주 정부가 요청하지 않고서는 CDC가 개입할 수 없다”고 말했다.
CDC의 독립성은 연방과 주 정부의 독특한 관계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다. 감염병에 대응하는 주체는 각 주 정부다. CDC는 전문가 조직으로서 각 주 정부의 업무를 조언하고 돕는 역할을 한다. 물론 CDC가 각 주 정부를 보조하는 역할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CDC는 감염병 관련 예산을 각 주 정부에 나눠주는 권한을 갖고 있다. 또 국가전자질병감시시스템(National Electronic Disease Surveillance System·NEDSS)을 통해 각 민간병원의 실험실을 직접 들여다볼 수 있는 권한도 있다. 무엇보다 각 주 정부의 감염병 전문가들이 CDC 출신이다. 지금도 상당수 CDC 직원이 각 주 정부에 파견돼 있다.
즉 미국의 감염병 대응 체계는 전문가 조직이면서 각 주 정부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CDC와 각 주 정부의 협력과 견제를 중심으로 짜여져 있다. CDC는 각 주 정부의 정치적인 이해로부터 자유로우므로 과학적·객관적 근거에 기반한 판단을 제시할 수 있다. 주 정부는 위기에 대처하는 독자적인 권한을 갖고 있지만 연방정부 산하 기관이자 전문가 조직인 CDC의 의견을 쉽게 무시하지 못한다.
질병관리본부 독립하면 감염병 대처 더 잘할까
지난 9월1일 우리 정부는 국가방역체계 안을 발표하면서 “질병관리본부가 감염병 전담기관으로서 국가방역을 책임지고 독립적으로 권한을 행사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또 “모든 위기단계에서 질병관리본부가 방역은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도록 하며 총리실과 복지부, 국민안전처는 지원 역할을 수행한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질병관리본부장을 차관급으로 위상을 강화하겠다는 안을 내놨다.
정부 안은 ‘질병관리본부가 감염병 방역에 관한 일은 모두 책임지라’는 의미다. 하지만 재난을 비롯한 모든 위기상황에서 대응의 중심은 정부다. 각 부처를 중심으로 국무총리실, 청와대로 이어지는 라인이 위기 상황을 컨트롤해야 정부가 가진 인적·물적 자원을 총동원할 수 있다.
미국에서 CDC와 각 주 정부의 관계를 살펴보니 우리 정부가 CDC의 독립성을 오해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CDC의 독립성은 전문가 조직으로서 과학적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질병관리본부에 부여한 독립성은 이와 다른 성질의 것이다. 질병관리본부는 형태적으로도 정부에서 독립되지 않았다. 많은 전문가들이 복지부 산하에서 질병관리본부를 분리할 것을 권고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다시 신종 감염병 사태가 닥쳤을 때 정부 계획대로 질병관리본부가 방역의 모든 일을 책임질 수 있을지 우려스럽다.
애틀랜타, 롤리=권기석 기자 keys@kmib.co.kr
미국 질병예방통제센터(CDC) 가보니…“병원명 공개는 상식”
입력 2015-12-14 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