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핵심 국정과제로 추진하는 법안들이 번번이 국회에서 막히고, 여야 지도부의 합의조차 무위로 돌아가는 일이 잦아지면서 여당의 협상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단적인 장면이 지난 2일 새벽 여야 지도부간 이뤄진 쟁점법안 처리 합의문 작성 과정이다.
당시 합의문에는 노동개혁법, 기업활력제고 특별법, 테러방지법, 북한인권법 등을 '합의 처리'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정치권에서 특정 법안이나 안건에 대해 '합의 처리'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소수 야당의 입장에서 '처리에 반대한다'는 뜻을 내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기왕에 통과시킬 생각이라면 굳이 '합의'라는 표현을 넣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통상 여당이 정치협상에서 '협의 처리'라고 쓰려 하는 것도 만일의 경우 강행 처리를 위한 보험을 두겠다는 의도다.
결국 예상대로 노동개혁법을 제외한 나머지 법안들은 이미 처리키로 한 시한을 넘겨서 합의문은 폐기됐다. 연말까지 통과시키로 한 노동개혁법 합의도 물 건너갈 공산이 크다.
어차피 처음부터 지켜지기 어려운 합의문을 작성한 셈이다. 당내에서 '합의하지 않기로 합의한 것'이라는 자조섞인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박근혜 정부가 역점적으로 처리하려는 이들 법안을 내년도 예산안에 연계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지렛대'를 잃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한 중진 의원은 13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협상팀이 순진했거나 성사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 보여주기식 합의문을 작성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면서 "야당과 협상할 때는 사전에 양쪽이 들고 있는 패를 정확하게 꿰뚫고 정교한 전략을 갖고 임하지 않으면 끌려 다니게 된다"고 말했다.
이런 '부실 협상'으로 인해 예산안 통과 이후 여당은 쟁점법안 처리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스피커 볼륨'만 높일 뿐 대안 없이 발만 동동 구르는 처지에 놓였다.
이에 앞서 지난 3월 임시국회에서는 야당이 요구한 '아시아문화중심도시조성 특별법'을 통과시키는 대신 여당이 요구한 영유아보육법, 크라우드펀딩법, 지방재정법, 관광진흥법을 4월 임시국회에 우선 처리한다고 합의하면서 '화'를 자초했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당 내에서는 "아무리 여야 협상을 위한 것이라지만 어떻게 특정 지역에 수조원을 세금으로 지원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느냐"며 대야 협상력 부재에 대한 질타가 쏟아졌다.
실제로 관광진흥법은 무려 8개월이 흐른 지난 2일에서야 통과됐다. 그나마도 야당이 요구했던 대리점거래공정화법, 모자보건법 등과 '주고받기식'으로 이뤄진 결과였지 3월 합의 결과는 아니었다.
나머지 법안들도 합의에 따른 4월 임시국회가 아니라 그 이후에서야 가까스로 통과됐다.
박 대통령이 지난 6월 국무회의에서 "국회가 꼭 필요한 법안을 당리당략으로 묶어놓고 있으면서 본인들이 추구하는 당략적인 것을 빅딜을 하고 통과시키는 난센스적인 일이 발생하고 있다"고 강도 높게 비판한 게 바로 이런 점들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일각에선 잇단 협상 파기의 원인은 원내 60% 이상을 차지하지 않는 한 야당의 협조 없이는 사실상 법안 처리가 불가능토록 한 현행 국회법(일명 국회선진화법)의 영향이 크다는 주장도 있다.
야당이 이를 활용해 소수당의 한계에도 쟁점 법안의 강행 처리를 '효과적으로' 막고 있고, 이 때문에 협상에 나서는 여당 지도부는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야당 요구를 최대한 수용하지 않을 수 없는 정치적 환경이 조성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의화 국회의장은 지난 10일 대국민 담화를 통해 국회선진화법에 대해 "높은 수준의 타협과 합의보다는 낮은 수준의 '거래'를 촉진하는 작용을 하고 있다"며 개정 필요성을 주장했다.
당청간 소통과 교감 부족도 하나의 원인이라는 지적도 있다. 청와대와 지속적인 '물밑 교감'이 없을 경우 협상의 마지노선을 설정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공무원연금법 처리 당시 국회의 시행령 수정 권한을 강화토록 한 국회법 개정안 처리를 수용한 게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당시 당 지도부는 이런 내용의 국회법 개정안을 고리로 합의를 도출했지만 결국 박근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여권은 한동안 내홍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김영석 기자 yskim@kmib.co.kr
“번번이 법안 거래에 합의문도 휴짓조각” …與, 대야 협상력 한계 자성론
입력 2015-12-13 07: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