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보면 길 보일까요” 마포대교 24시간 기자가 만난 사람들

입력 2015-12-10 19:53
-그들은 왜 마포대교를 걸어서 건넜을까?-

서울 기온이 영하로 내려간 8일 오전 9시. 지하철 마포역부터 걸어서 마포대교 서쪽 인도에 올라섰다. 강바람은 더 차가웠다. 여의도를 향해 걷는데 맞은편 동쪽 인도에서도 한 남성이 걷고 있었다. 우리는 쌩쌩 달리는 차들을 사이에 두고 10여분을 나란히 걸었다.

정장을 입은 그는 몇 걸음 터벅터벅 걷다 멈춰서기를 반복했다. 자꾸만 한강을 바라봤고,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왜 그러는지 물어보려면 먼저 여의도에 도착해야 했다. 서둘러 다리를 건너 여의나루역까지 쫓아가서야 그를 붙잡아 세울 수 있었다.

이 겨울에 1.4㎞ 마포대교를 걸어서 건너는 이들이 있다. 운동 나온 차림도 아니고, 산책하기 좋은 날씨도 아니다. 차를 타면 3분도 안 걸리는데 굳이 20여분을 들여 매서운 강바람 맞으며 다리를 건넌다. 왜 그러는 건지, 저 남성을 만난 것과 같은 방식으로 8일 오전 9시부터 24시간 동안 마포대교 걷는 이들을 만나 물었다.


한강에 해가 떠오르고

“마지막일지 몰라 한번 건너보고 싶었어요.” 여의나루역 앞에서 A씨(29)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이날 아침 인턴으로 일하던 여의도의 잡지사에 그만두겠다는 말을 하고 나왔다고 했다. 3년 전 서울 사립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아르바이트로 버티다 구한 일자리였다. 글쓰기를 좋아해 잡지사 일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사람 만나는 게 영 힘들었단다.

A씨는 “회사는 참 좋은 곳이었어요. 제가 안 맞았던 거죠”라고 여러 번 말했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아 마포대교를 걸어서 건너갔다 다시 걸어서 돌아온 거였다. 중간에 뭔가 소리를 지른 건 아마 자신을 향한 꾸짖음 같은 거였을지 모른다. 여의나루역을 내려가면서 에스컬레이터를 두고 굳이 계단을 택했다. 집에 빨리 가도 할 게 없다고 했다.


오전 11시가 되자 마포대교를 걷는 사람이 꽤 많아졌다. 그 사이로 앳된 여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재수학원에서 친구가 됐다는 이진표(19) 이민희(19) 박서현(19)양. 수시모집 결과를 기다리다 나온 거였다. ‘셀카’ 찍으며 웃고 떠드느라 좀처럼 걷는 속도를 내지 못했다. “시간은 많은데 돈이 없어서요. 그냥 이렇게 종일 다니려고요” 하더니 “우리 재수했다고 (기사에) 우울하게 나오는 거 아니죠?”라고 발랄하게 물었다.

오후 1시쯤 대학생 문성은(19·여)양이 귀에 이어폰을 꽂고 마포대교 남단에 올라섰다. 마포역 근처 미술학원에 가는데 한 정거장 전인 여의나루역에 내린 터였다. 문양은 전공을 미술로 바꾸려 하는 중문과 학생이었다. 학원에서 재능 있는 후배들 볼 때마다 ‘난 너무 늦었나’ 생각이 들고, 그래서 걷는다고 했다. 문씨는 “이렇게 마포대교를 걸어야 마음을 다잡고 미술학원에 갈 수 있다”고 말했다.

김영찬(23)씨는 이날 전역한 군인이었다. 여의도에서 동기생들과 전역 기념 점심을 먹고 집까지 걸어가는 길이라고 했다. 전역 기분에 들떠서인지 야전상의를 벗어 들고 있었다. ‘생명의 다리’ 문구를 유심히 읽던 그는 “복학 전까지 뭘 할지 계획을 짜야겠다”며 걸음을 재촉했다.

오후 3시가 되자 여의도 IFC몰 위에 해가 올라섰다. 노란 햇빛이 마포대교를 따라 나란히 한강에 내렸다. 모녀도 몸이 닿을 듯 말 듯 거리를 유지하며 나란히 마포대교를 걸어왔다. 22세 딸의 진로 문제로 며칠간 딸과 신경전을 벌였다는 어머니는 딸의 ‘데이트 신청’에 못이기는 척 따라 나왔다고 했다.

어머니는 “화해하자고 바로 화해가 되나요. 그냥 이렇게 한강 보면서 걷다 보면 풀리기도 하고 어떻게든 되겠죠”라며 미소를 지었다. 토라졌던 딸도 입가를 씰룩였다. 모녀는 다리 중간 벤치에 앉아 한동안 밀린 이야기를 나눴다.

오후 3시30분의 마포대교는 여의도 빌딩 청소원 장모(65·여)씨의 퇴근길이다. 장씨는 “집에 가서 저녁 먹고 일찍 자야 내일 새벽 4시에 나올 수 있다”며 “시간이 없으니 이렇게라도 걸어야 건강을 챙긴다”고 말했다.


해가 지자 바람이…

오후 5시가 되자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해가 모습을 감출수록 강바람은 더 거세졌다. 취업준비생 이모(22·여)씨가 찬 바람을 맞으며 혼자 걷고 있었다. 이씨는 “2년간 다닌 회사가 적성에 안 맞아 2주 전 그만뒀다”며 “내 길이 뭔지 모르겠고 답답해서 나왔다. 마포대교 간다니까 친구들이 뛰어내리지 말라더라”며 웃었다. 이씨는 ‘내일이 더 기대되는 사람’이라는 난간 문구 앞을 한참 서성이더니 휴대전화로 그 문구를 촬영해 돌아갔다.


박경진(26·여)씨는 2시간을 걸어 마포대교에 왔다고 했다. 시내 회사의 계약직 콜센터 직원인데 오후 7시30분 퇴근해 줄곧 걸었고, 마포대교도 걸어서 건너는 길이었다. 이렇게 집에 가면 꼬박 3시간이 걸린다. 도대체 왜? 박씨는 “이렇게 걸어야 전화상담 스트레스도 풀리고 앞으로 뭘 할지 고민도 해볼 수 있다”며 “걷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고 답했다.

날이 바뀌었다. 마포대교도 텅 비었다. 과연 이 밤중에 걷는 사람이 있을까? 오전 1시18분, 멀리 여의도 쪽에서 중년 남성이 걸어왔다. 그는 기자를 경계했다. 어디서 출발했냐는 뜻으로 “어디서 오셨냐” 물었는데 “중국동포”라고 했다. 왜 걷느냐 물으니 “왜요? 누가 시켜서 왔어요?”라고 한다.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곤 “저 앞에 경찰 있어요?”라고 되물었다.

오전 1시30분쯤 소방차 3대와 순찰차 1대가 마포대교에 나타났다. 한강에는 경광등을 켠 모터보트까지 등장했다. 소방서 상황실에 전화해보니 “자살하려는 동생을 찾아 달라”는 30대 여성의 신고가 접수된 터였다. 한참을 수색한 경찰은 마포역 인근에서 그 동생을 찾아냈다. 마포대교에 오르기 직전이었다.



다시 해가 뜨고

오전 4시30분 마포대교의 하루는 이미 시작됐다. 전날 오후 3시30분 퇴근길에 만났던 빌딩 청소원 장씨가 다시 마포대교에 왔다. 이번엔 출근길이었다. 그는 알람시계가 오전 3시30분에 맞춰져 있다고 했다. 가방에는 아침·점심 도시락 2개가 들어 있었다. “빨리 가서 사무실에 청소기 돌려야 한다”며 걸음을 서둘렀다.

오전 7시가 다 돼서야 날이 훤해졌다. 서류가방을 든 심준원(42)씨가 걸어왔다. 집에서 직장까지 50분 거리를 4년째 걸어 다닌다고 했다. 마침 철새들이 무리지어 마포대교 위를 날아갔다. 그는 “저거 보세요. 서울에 이런 데가 없어요. 저는 매일 봐요”라고 했다. 심씨는 SNS에 이런 출근길 풍경을 자주 찍어 올린다. “하루 종일 콘크리트 건물에서 모니터만 보고 있는데, 오갈 때도 땅속으로 다니면 얼마나 답답해요?”

김판 기자 pan@kmib.co.kr 온라인 편집=김상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