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대통령의 단어 선택에 몰입하는가

입력 2015-12-10 15:54
사진=청와대 사진기자단
사진=청와대 사진기자단
“젊은이들 가슴에 사랑 없어져” 유감

박근혜 대통령은 만기친람형 발언으로 유명하다. 청와대에서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한다 치면 이를 받아 적는 사람은 손이 아플 정도다. 발언 자체만 A4 용지 한두 장 훌쩍 넘을 정도다. 한때 ‘적자생존(적는 자만이 살아남는다)’이란 화두가 청와대에서 떠돌 때 A4 용지를 네 번씩 접어 앞뒤로 받아 적느라 장관들 고생이 많았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박 대통령 발언의 전체 맥락과 의도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혼이 비정상” 내지는 복면시위 관련 “IS도 지금 그렇게 하고 있지 않느냐” 정도만 회자된다. 안타까운 일이다.

10일에도 이런 일이 반복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직접 주재한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제3차 회의에서 “지난 10년간 출산율 감소의 가장 큰 원인은 초혼연령 상승에 따른 만혼화 현상”이라며 “젊은이들이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소득이 없고, 고용이 불안해 결혼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주거문제, 남성 외벌이 중심 사고 탈피 등등을 일일이 지적했다.

하지만 이를 전하는 국가기간통신사의 포털사이트 송고 뉴스 제목은 ‘朴대통령 “만혼은 일자리 때문… 젊은이들 가슴에 사랑 없어져”’였다. 물론 박 대통령은 같은 자리에서 “지금 우리나라가 이(저출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방치하면 젊은이들 가슴에 사랑이 없어지고, 삶에 쫓겨가는 일상이 반복될 것”이라고 말하기는 했다. 대통령이 “젊은이들 가슴에 사랑이 없어지는” 현실에 충분히 애틋함을 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일자리 대책, 행복주택 확대제공, 육아휴직제도 실효확보 등등을 언급한 사실은 잘 전해지지 못했다.

이를 반영하듯 포털사이트에는 “대통령 해결 못하면 한국인 가슴에 사랑 없어져”라는 통신사 기사 제목을 패러디한 글이 많은 공감을 얻었다. 또 “젊은이들 가슴에 사랑이 없어져서가 아니라 돈이 없어져서”라는 글도 보였다. 심지어 대통령 본인이 미혼이라는 다소 무엄한 지적도 나왔다. 독특할 수도 있는 대통령의 어휘와 문법을 넘어 정책의 타당성 자체에 집중해야 정부가 그토록 바라는 비정상이 정상화된다.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