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온의 영화이야기] (48) 스파게티 웨스턴의 추억

입력 2015-12-07 17:00 수정 2016-01-05 09:53

스파게티 웨스턴은 기묘한 매력이 있는 장르다. 지금은 완전히 한물 간, 거의 잊혀진 서부극의 한 변종에 불과하지만 정통 웨스턴과는 또 다른 특별한 느낌을 준다.

뭐랄까, 때로는 아이들 학예회처럼 어설픈 듯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겉으로 꾸며진 무대장치가 아니라 미국 서부의 속살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듯한 생경함과 생생함을 아울러 풍기기도 한다. ‘진보’와 ‘수정주의’가 판치던 1960년대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이 시대의 산출물은 동시대를 살아본 사람들에게는 결코 뺄 수 없는 추억의 한 조각을 제공한다.

당시 쏟아져 나온 수많은 스파게티 웨스턴 중에서도 대단히 이색적이었던, 그래서 쉬 잊히지 않는 영화 몇 편을 소개한다.

우선 세르지오 레오네와 함께 스파게티 웨스턴의 양대 산맥으로 분류되는 세르지오 코르부치 감독의 ‘Il Grande Silenzio(사진, 1968)’. ‘위대한 침묵’이자 ‘위대한 벙어리’, 또는 ‘위대한 실렌지오(사람 이름)’라는 중의적 제목의 이 영화는 코르부치의 걸작일 뿐 아니라 스파게티 웨스턴 역사상 최고 명작 중 하나로 꼽히는 컬트 클래식이다.

이 영화는 여러 면에서 스파게티 웨스턴의 컨벤션을 파괴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첫째, 배경. 일반적으로 스파게티 웨스턴 하면 작열하는 태양과 흙먼지 날리는 멕시코나 애리조나, 텍사스의 황야가 연상되기 마련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스파게티 웨스턴은 이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덥고 건조한 스페인의 사막지대에서 촬영됐다.

그러나 이 영화의 배경은 눈 쌓인 유타주다. 그래서 이탈리아의 스키 리조트인 코르티나 담페초 등지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그런 만큼 등장인물들은 스파게티 웨스턴의 의례적인 소품인 땀에 찌든 누더기나 판초 대신 두툼한 털옷으로 온몸을 꽁꽁 싸매고 화면을 누빈다.

둘째, 벙어리 주인공. 영화제목이 말해주듯 주인공인 총잡이 실렌지오는 벙어리다. 상당히 특이한 설정인데 여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프랑스 배우 장 루이 트랑티냥은 클로드 를루슈 감독의 로맨스영화 ‘남과 여(1966)’에서 아누크 에메의 상대역으로 나왔던 유명한 배우. 그는 나중에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진지한 영화 ‘컨포미스트(1970)’ 등에도 출연한 ‘정극배우’로서 이미 국제적으로 명성을 쌓고 있었다.

그런 그를 코르부치가 스파게티 웨스턴에서 써먹으려고 하자 그는 조건을 달았다. 대사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 그 결과 그는 극중 벙어리가 됐고, 영화 제목마저 아예 ‘위대한 침묵’이 돼버렸다.

셋째, 주인공이 죽는다(이 비극적 엔딩 때문에 국내에서는 극장에서 상영되지 않았다). 스파게티 웨스턴이란 게 주인공이 꼭 선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관객들이 동일시하고 공감을 갖는 게 주인공이라고 할 때 주인공을 죽이는 일은 좀처럼 없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악당에게 총을 맞아 죽는다.

영화적 설정은 이렇다. 악당(클라우스 킨스키 분)이 현상금을 쫓는 ‘바운티 헌터’이고 주인공은 법을 어겨 바운티 헌터에게 쫓기는 사람들 편에 선 총잡이다. 그런데 결국 바운티 헌터들이 싸움에서 이긴다. 명분은? 비록 바운티 헌터지만 ‘법의 편’이라는 것. 어찌 됐건 ‘법=정의’라는 형식논리다. 이 엔딩을 놓고 논란이 일자 코르부치는 주인공이 살아남는 ‘해피 엔딩’판을 따로 만들기도 했다.

두 번째 영화는 국산 스파게티 웨스턴이다. 미국 고유의 장르지만 이탈리아에서 환골탈태시켜 선풍을 일으킨 서부극이 스파게티 웨스턴이라면 한국이라고 서부극을 못 만들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굳이 이름 붙이자면 ‘칼국수 웨스턴’이라고나 할까.

안일남이라는 낯선 감독(이 영화가 데뷔작이자 유일한 작품이었다)이 만든 ‘당나귀 무법자(1970)’. 워낙 오래 전 화면에 비 내리던 동시상영관(어쩌면 재개봉관이었던가)에서 본 탓에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구봉서가 한국판 클린트 이스트우드였고, 뚱뚱이 양훈이 많은 스파게티 웨스턴에서 멕시코 산적두목을 단골로 연기했던 페르난도 산초 역할을 맡았던 이 영화의 몇 장면은 아직도 생각난다.

마치 ‘황야의 무법자’처럼 판초를 걸치고 수염이 덥수룩한 것까지는 같지만 시가 대신 곰방대를 입에 문 구봉서가 악당 양훈과 그 패거리가 득시글거리는 말죽거리(산타페도 엘패소도 툼스톤도 아닌)의 주막에 들어가 “쇠죽거리에서 왔다”며 호기롭게 “막걸리 더블”을 외치던 장면.

워낙 저예산에 날림으로 만든 영화라 어릴 적 보면서도 뭐 저딴 영화가 다 있나 싶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그 때 그 정도나마 패러디 코미디영화가 나올 수 있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영화는 ‘괴작(怪作)’ 대접을 받아 충분하다고 여겨진다. 특히 산초 양훈의 연기는 대단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오리지널 산초가 무색할 만큼 멋진 악역.

그 다음 기억나는 영화가 ‘5인의 군대(Five-Man Army, 1969)'다. 5명의 무법자가 모여 멕시코에서 금을 실은 열차를 털어 멕시코 혁명군에게 넘긴다는 얘기. 스파게티 웨스턴의 서브장르인 이른바 ‘사파타 웨스턴’의 하나다.

사파타 웨스턴이란 멕시코 혁명의 영웅 에밀리아노 사파타에서 따온 명칭으로 멕시코 혁명을 주소재로 해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스파게티 웨스턴을 말한다. 세르지오 코르부치가 프랑코 네로와 토마스 밀리안 등을 기용해 많이 만든 서브장르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 영화 역시 상당히 이색적이었다. 특히 스태프와 캐스트. 감독이 미국인 배우 겸 감독 돈 테일러(배우로서는 윌리엄 홀든과 공연했던 1953년작 ‘제17포로수용소’가 유명하다)였는데, 각본은 나중에 공포영화 감독으로 명성을 떨치는 다리오 아르젠토가 썼다.

출연진을 보면 당시 국내에서도 방영돼 큰 인기를 끌었던 TV시리즈 ‘제5전선(Mission Impossible)'의 대장 역할로 친숙한 피터 그레이브스가 역시 무법자들의 대장역을 맡았고, 뮤지컬 명작 ‘셸부르의 우산(1964)’에서 카트린 드뇌브의 상대역으로 나왔던 잘생긴 청년 니노 카스텔누오보가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더러운 모습의 멕시코 건달로 출연해 눈길을 끌었다.

또 뒤에 테렌스 힐과 짝을 이뤄 ‘튜니티’시리즈로 큰 인기를 얻었던 털북숭이 뚱보 버드 스펜서가 테렌스 힐 없이 혼자서 거구를 이끌고 뒤뚱거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보다 더 눈길을 끈 캐스트는 일본배우 단바 데쓰로(丹波哲郞)였다. ‘007 두 번 산다(1967)’에서 일본 비밀첩보부대 수뇌 타이거 다나카로 나오기도 했던 단바는 일본도를 휘두르는 사무라이 역할로 출연했는데 이 영화는 웨스턴에 사무라이를 접목시킨 첫 케이스였다(2년 뒤인 1971년 미후네 토시로가 사무라이 역할로 테렌스 영의 서부극 ‘레드 선’에서 알랭 들롱, 찰스 브론슨과 공연했다).

하긴 일본에서도 일본판 스파게티 웨스턴이 만들어졌다. 미이케 다카시 감독이 연출한 ‘스키야키 웨스턴 장고’. 하지만 이 영화가 나온 것은 2007년이었다. 그러니 ‘당나귀 무법자’가 동양권에서는 얼마나 시대를 앞서간 영화였는지 알 수 있다.

어쨌든 ‘5인의 군대’에서 단바는 일본도를 휘둘러 총을 쏘는 악당들-멕시코정부군 병사들-을 짚단 베듯 베어 넘기는가 하면 달리는 기차에서 떨어진 뒤 쏜살같이 뛰어서 언덕을 넘고 들판을 가로질러 다시 기차에 올라타는 놀라운 활약상을 보인다. 당시 서양인들은 사무라이를 무슨 슈퍼맨쯤으로 생각한 게 아닌가 싶다.

이밖에 세르지오 레오네의 마지막 스파게티 웨스턴 ‘석양의 갱들('Duck, You Sucker' 또는 'A Fistful of Dynamite' 1971)'도 특이한 영화로 기억에 남는다. ’5인의 군대‘와 마찬가지로 ’사파타 웨스턴‘의 하나지만 스파게티 웨스턴치고는 상당한 스타들이 동원됐다. 제임스 코번과 로드 스타이거. 스타이거야 이미 ’밤의 열기 속으로(1967)‘에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연기파 거물이고, 코번 역시 스파이 ’플린트‘ 시리즈로 이미 국제적 톱스타 위치를 굳힌데다 더욱이 레오네가 자기 영화에 출연시키려고 오랫동안 공을 들인 배우였다.

알려지기로 레오네는 원래 스파게티 웨스턴의 효시인 ‘황야의 무법자(1964)’ 주인공 감으로 존 스터지스 감독의 ’황야의 7인(1960)‘에서 멋지게 나온 코번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그가 책정된 예산보다 출연료를 더 많이 부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당시 코번보다 출연료가 쌌던 클린트 이스트우드로 방향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는 후문도 있다. 그렇다면 레오네로서는 거의 10년만에 소원 풀이를 한 셈이다.

출연진 외에 또 하나 이 영화의 재미는 음악이다. 앞서의 두 영화도 그렇지만 이 영화의 음악도 국내에서 ‘황야의 악성(樂聖)’으로 불리던 엔니오 모리코네가 맡았다. 당시 모리코네는 스파게티 웨스턴은 물론 일반 영화까지도 거의 대부분의 유럽영화 음악을 휩쓸다시피 했다.

이 영화의 주제음악은 기막히게 아름다웠으나 문제는 희한한 코러스였다. “쑝 쑝” “쑝 쑝”하는 코러스가 아름다운 멜로디에 덧씌워지면서 그로테스크한 효과를 냈다. 영화음악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꼭 들어보기를 권한다.

최근 들어 퀜틴 타란티노가 전쟁물이긴 하지만 ‘바스타즈: 거친 녀석들(2009)’에서 스파게티 웨스턴적 냄새를 풍긴데 이어 리메이크물 ‘장고:분노의 추적자(2012)’에서 본격적으로 스파게티 웨스턴을 부활시키려했으나 역부족임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두 세르지오(레오네와 코르부치) 같은 재능 있는 감독들이 아쉽다.


김상온(프리랜서 영화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