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에는 영화의 내용이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올해 한국 영화 가운데는 유독 기자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들이 많았습니다. 지난여름에는 개봉하지 못한 채로 2년을 묵은 ‘소수의견’이 공개됐고, 하반기 들어서는 ‘특종 : 량첸살인기’(‘특종’), ‘내부자들’, ‘열정, 같은 소리하고 있네’(‘열정’)가 차례로 관객 앞에 모습을 드러냈죠. 만듦새를 따지고 본다면 졸작도, 수작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 반영도만 두고 본다면 이 작품들은 공히 성공을 거뒀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런 게 기자다’라고 말할 수 있는 캐릭터는 없지만 ‘열정’의 하재관(정재영)은 물론이고 ‘내부자들’의 이강희(백윤식)도, ‘소수의견’의 수경(김옥빈)도, ‘특종’의 조정석도 현실에 존재합니다. 실제와 심하게 다른 부분이 있다면 ‘특종’에서 조정석이 정치부 차장으로 승진한 뒤 휘황찬란한 개인 사무실과 명패를 받은 것 정도랄까요?(실제로는 부장에게도 따로 ‘부장실’이 없는데 말입니다.)
이 영화들이 다룬 언론계의 현실에 대해 말하면서 인터넷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 가지 ‘어른들의 사정’으로 언론에 드러낼 수 없는 정의들은 영화 속에서 대개 인터넷에 ‘폭로’됩니다. 영화 ‘아저씨’가 공권력의 사각지대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사적 복수를 감행하는 주인공을 그리며 통쾌함을 줬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겠네요. ‘내부자들’에서는 동영상 전문 커뮤니티에 게재된 성접대 동영상이, ‘열정’에서는 사주(社主)의 지시로 출고되지 못한 대신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린 기사가 부패한 권력들을 단죄합니다.
이를 단순히 ‘만물인터넷설’로 치부하기에는 시사점이 뼈아픕니다. 영화와 같은 해피 엔딩은 없을 지라도 이와 유사한 상황들이 현실에서 종종 목격되는 탓입니다. 기실 권력에 대한 합리적 의심이 언론사보다 더 많이 벌어지는 곳이 온라인 커뮤니티입니다. 특히 ‘열정’에서는 포털 사이트에 힘을 뺏긴 언론사의 현주소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수습기자 도라희(박보영)는 단 한 번도 자신의 기사를 회사 홈페이지에서 검색하지 않습니다. 첫 ‘단독’ 보도에 성공한 도라희는 남자친구(류덕환)에게 자랑하듯 말합니다. “네이버 좀 들어가 봐.”
또 “광고를 빼겠다”는 말 한 마디에 스러진 도라희의 정의는 SNS, 온라인 커뮤니티, 포털에서 부활합니다. 그가 쓴 진실 폭로 기사는 내·외부의 압력에 의해 출고되지 못하지만, 동료들에 의해 인터넷에 퍼집니다. 이들의 목표는 포털 검색어에 기사 속 주인공의 이름을 올리는 것이죠. 그 과정에서 이런 대사도 나옵니다. “페이스북에 맞춰서 좀 줄여 올려보는 게 어떨까?” 수많은 언론사가 밤낮 ‘온라인 퍼스트’ ‘모바일 퍼스트’를 외치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기존의 방식을 버리고 인터넷상에 주어진 포맷에 맞출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보리라는 믿음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계의 위기’를 말하는 것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습니다. 변해버린 환경에 적응하든지, 낭만화돼버린 ‘저널리즘’을 되살릴지를 선택해야겠죠.
현실에서 매우 많은 기자들의 머리를 싸매게 한 이 변화가 무조건적 해결 방식으로 그려지는 점은 매우 아쉽습니다. 이러한 양상이 미디어를 통해 반복 재생산되고 있다는 점도요. 이미 인터넷에서는 단순히 억울한 일이 생겼을 때 덮어 놓고 이를 인터넷에 올려 공론화시키는 경우가 횡행합니다. ‘주문한 치킨이 덜 익은 채로 나왔는데 사과도 없었다’는 골자의 사연은 원 게시자의 사과로 끝날 때가 적지 않죠. 오히려 이 과정에 정의와 윤리는 없습니다. 순간적인 분노가 ‘업로드’ 버튼을 누를 것을 종용합니다. 이렇게 폭발한 감정은 ‘리벤지 포르노’ 같은 형식으로 발현되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사적 복수의 보급화입니다. ‘기-승-전-인터넷’이라는 혹평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이 같은 모순적 현실들을 다룰 때는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영화는 영화다’로 끝내기 어려운 이야기들입니다.
post script. ‘열정’을 본 사람 중에는 상사의 얼굴에 하재관 부장이 겹쳐 보이는 것을 느끼는 이들이 적지 않을 듯합니다. 생각해보면 ‘열정’의 행복한 결말은 다소 비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하 부장처럼 목이 쉴 때까지 ‘X랄’을 해 주는 선배도, 이를 감당할 만큼 단단한 후배도 드문 현실 때문이겠죠.
라효진 기자 surplus@kmib.co.kr
현실이 된 모순들, 그 앞에 선 언론…‘내부자들’·‘열정’
입력 2015-12-04 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