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아사히신문이 2차 대전 중에 군의 거짓 선전을 그대로 ‘받아쓰기’하는 등 신문의 사명을 저버렸던 사실에 관해 반성하는 특집 기사를 게재해 눈길을 끌고 있다.
아사히는 2일 조간신문을 통해 “최근 안보법안 제·개정으로 전쟁과 평화를 되물어야 할 시점이 됐다”고 한 뒤 과거 일본이 전쟁을 선택했을 때 신문이 무엇을 했는지 돌이켜보자는 취지로 자신들이 남겼던 ‘큰 오점’을 조명했다. 아사히가 고백한 ‘부끄러운 역사’는 다음과 같다.
◇1942년 일본군이 미군에게 대패했던 미드웨이 해전 당시 아사히는 “(적에게) 심대한 손해를 안겨줬다”고 정반대의 결과를 선전한 군의 발표를 그대로 전했다. 또 미국과 영국의 병사를 ‘귀축(鬼畜·귀신과 짐승)’이라고 불러 독자의 증오를 부추겼다.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이 스스로 철도의 일부를 폭파(일명 류탸오후 사건)하고도 아사히를 비롯한 일본 신문들은 이를 ‘중국 병사의 짓’이라는 군부 선전을 그대로 보도했다. 또 사설을 통해 일본군의 군사행동이 자위권을 행사한 것인 양 포장해 정당화했다.
◇류타오후 사건 다음날 군이 일왕의 명령도 받지 않고 한반도에 있던 일본 육군을 만주로 파병해 일왕의 군 통수권을 침해했지만, 육군성을 담당하는 기자들은 이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는 기사를 쓰지 않았다.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해서도 아사히를 비롯한 일본 신문들은 이를 ‘어쩔 수 없는 임기(臨機) 처치’로 서술했다. 일본군이 괴뢰 국가인 만주국을 세웠을 때에도 일본 신문들은 ‘환영’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아사히는 이런 사례들을 소개하면서 “사실을 보도하고 언론의 자유를 관철하는 전통을 지키지 못한 시기”였다고 반성의 입장을 내놨다. 이 신문은 자사가 애초에는 군부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나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전쟁에 협조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당시 기자들 사이에서도 보도 태도의 변화에 대한 비판과 우려가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애초에 군부에 비판적이었던 것 때문에 군이나 우익세력으로부터 ‘반군’, ‘적국’이라고 매도당하고 우익단체의 폭력 행사 위협에 시달리거나 만주사변 발생 후 아사히신문 불매 운동이 각지에서 벌어지는 등 압력을 받은 것이 태도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일본의 대표적인 진보 성향의 매체로 평가받는 아사히신문은 1991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녹취록을 처음 보도해 이 문제를 공론화시켰다. 그러나 이로 인해 줄곧 일본 우익 세력들로부터 대대적인 공격을 받기도 했다.
이종선 기자 remember@kmib.co.kr
日 아사히신문 “전쟁 협력은 큰 오점” 자사의 부끄러운 역사 공개 반성
입력 2015-12-02 20: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