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name is Bond, James Bond(나는 본드입니다, 제임스 본드죠).” 영화사상 가장 유명한 대사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이 대사를 지금까지 스크린에서 읊조린 사람은 모두 6명이다. 숀 코너리부터 조지 레이즌비를 거쳐 로저 무어, 티모시 돌턴, 피어스 브로스넌, 그리고 대니얼 크레이그까지.
그러나 크레이그의 본드 역 하차가 머지않은-들리기로는 그가 주연한 24번째 본드 영화 ‘스펙터’가 최근 개봉된데 이어 앞으로 제 25작과 26작까지 두 편 더 찍고 나서 본드역에서 물러난다고 한다-것으로 알려지면서 일곱 번째로 희대의 스파이 007 제임스 본드를 누가 맡을지 영화팬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제임스 본드를 영화로 만들 수 있는 원작 소설은 오리지널 원작자인 이언 플레밍이 쓴 장편 12편과 9편의 단편이 있을 뿐만 아니라 1964년 플레밍의 사망 후에도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 다른 작가들이 써낸 여러 편이 있다. 우선 대중작가가 아닌 유명 본격작가인 킹슬리 에이미스가 로버트 마컴이라는 필명으로 장편을 한 권 썼고, 존 가드너가 장편 14권을 낸데 이어 레이먼드 벤슨이 장편 6권, 단편 3편을 썼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그 뒤로도 세바스천 포크스, 제프리 디버, 윌리엄 보이드, 앤소니 호로위츠가 제임스 본드 소설들을 계속 내놨다. 그러니 앞으로도 본드 영화들은 무궁무진하게 만들어질 수 있는 셈이다.
이에 따라 인터넷에는 벌써부터 차기 본드로 물망에 오른 후보들의 리스트가 넘쳐난다. 개중에는 흑인과 여성, 그리고 남미와 인도 출신 배우까지 들어가 있는 등 ‘진보’나 ‘파격’을 표방하고 있지만 장난 같은 것들도 많다.
그렇다면 앞으로 제임스 본드역을 맡을 배우는 어떤 조건이어야 하는가. 성공적이었던 역대 본드 배우들을 기준으로 살펴보자.
첫째, 영국인(British)이어야 한다. 여기에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즈 출신이 모두 포함된다. 본드는 뭐니 뭐니 해도 영국의 대외 첩보기관 MI6 소속이다. 한마디로 ‘여왕폐하의 비밀 첩보원’인 것이다.
영국이 지금은 쪼그라들었지만 한때 전 세계를 주름잡던 제국으로서의 영광과 전통은 죽지 않았다. 특히 정보 분야에서는 여전히 세계 최상급 국가다. 영국인으로서 자부심과 자존심이 강한 본드가 다소 딱딱하지만 우아한 영국식 액센트로 말하지 않는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런 만큼 대서양 건너 ‘사촌’ 미국이나 ‘유사 영국’인 호주, 캐나다 출신도 안 된다. 유일하게 달랑 한 편 출연으로 단명했던 2대 본드 조지 레이즌비는 떠들썩한 공개경쟁을 거쳐 선발된 미남에 호남이었지만 ‘불행하게도’ 호주 출신이었다. 지금은 어디 가서 본드 배우라고 내세우기도 부끄러울 정도의 대접을 받고 있다.
참고로 코너리는 스코틀랜드, 무어와 크레이그는 잉글랜드, 돌턴은 웨일즈, 그리고 브로스넌은 아일랜드 출신이다. 이와 관련해 일부 리스트에 포함된 휴 잭맨과 샘 워딩턴은 본드역으로 호감을 주는 스타이긴 하지만 레이즌비처럼 호주 출신이라는 게 큰 약점이다. 또 가장 본드역에 근접한 배우 중 하나로 평가받는 마이클 파스벤더도 독일 출신이라는 핸디캡을 안고 있다.
하긴 과거로 돌아가 보면 1970년대에 코너리가 하차한 후 당시 액션계의 거물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버트 레이놀즈가 강력하게 007 후보에 올랐으나 결국 ‘영국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탈락한 적도 있다.
둘째, 나이. 본드는 애송이도 늙다리도 아니다. 아마도 30대 중후반에서 40대 초반쯤. 실제로 역대 본드 배우들이 몇 살 때 처음 본드역을 맡았는지 보자. 코너리 32세, 레이즌비 25세, 무어가 가장 많아 46세, 돌턴 41세, 브로스넌 42세, 크레이그 37세. 크레이그가 앞으로 몇 년 뒤까지 본드 역할을 계속할지 분명치 않으나 현재 너무 어리거나 나이가 많은 배우들은 후보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영국인 배우 중 본드의 직속상관 M역으로 이미 발탁됐으면서도 여전히 차기 본드로도 물망에 오르고 있는 롤프 파인스는 52세이고 앤젤리나 졸리 연출의 ‘언브로큰(2004)’에 출연해 성가를 높인 뒤 본드 후보군에 포함된 신예 잭 오코넬은 25세다. 너무 나이가 많거나 적다.
이와 관련해 현재로서 본드역으로 가장 잘 어울릴 것으로 평가되는 영국인 배우 제임스 퓨어포이도 아깝다. 그도 올해 51세이기 때문이다. TV 미니시리즈 ‘로마’에서 마크 안토니역으로 유명해진 뒤 ‘솔로몬 케인(2009)’ 같은 시시껄렁한 영화의 타이틀롤을 맡았지만 아직은 그다지 이름을 날리지 못한 그는 그러나 1995년에 이미 본드역을 놓고 최종후보로 브로스넌과 다투다 아깝게 떨어진 경력이 있을 만큼 본드로 손색이 없는 배우다.
셋째, 캐릭터. 본드는 맨손 격투나 무기술에 뛰어난 강인한 전사지만 동시에 이튼스쿨과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인텔리다. 터프함과 지적인 이미지가 함께 갖춰져 있어야 한다. 아울러 무조건 ‘정의의 화신’이기만 해서도 안 된다. 때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잔인하고 야비해질 수 있는 나쁜 사나이의 ‘자질’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런 복합적인 분위기를 한꺼번에 풍겨낼 수 있는 배우는 찾기 쉽지 않다.
마지막으로 본드로 발탁될 당시 너무 톱클래스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무명이지도 않은, 적당히 알려진 상태여야 한다. 역대 본드 배우들을 보면 아예 배우 경력이 전혀 없었던 레이즌비만 제외하고 모두 이 범주에 든다.
그런 의미에서 일부 리스트에 의하면 가장 본드역에 어울리는 것으로 지목되는 크리스천 베일(웨일즈 출신, 41)은 “브로스넌이 코너리의 진정한 후계자라면 베일은 브로스넌의 후계자”라는 평을 받을 정도지만 이미 많은 블록버스터 영화에 출연한 톱스타급이라는 게 걸림돌이다.
베일뿐 아니다. 여기저기서 ‘딱 본드’라고 추천받는 클라이브 오웬도 이미 톱스타급이고, ‘트랜스포터’ 시리즈의 제이슨 스태텀도 일부 팬들이 후보로 올려놓고 있으나 이미 너무 커져버린 감이 있다. 물론 두 사람은 모두 영국인이다.
이처럼 일부 ‘자격이 안 되는’ 후보군을 제쳐놓고 나면 조건들을 갖춘 배우들은 그리 많지 않다. 몇몇이 눈에 띄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잡지 에스콰이어를 비롯해 여러 리스트에 포함된 이드리스 엘바는 역시 빼는 게 좋겠다. 비록 영국인(잉글랜드 출신)이라 해도 흑인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천지개벽’해 ‘흑인 본드’가 나온들 어떠랴지만 본드가 흑인이라는 건 다소 과장하자면 영국 왕실을 흑인으로 설정하는 거나 마찬가지 아닐까.
엘바까지 제외하면 물망에 오른 후보는 몇 안 된다. 우선 대미언 루이스. 국내에는 TV 미니시리즈 ‘밴드 오브 브라더즈’로 잘 알려진 배우다. 잉글랜드 출신, 44세. 한 가지 ‘흠’이라면 붉은 머리라는 건데 원래 본드가 검은 머리임에도 크레이그가 금발의 본드를 연기했으니 붉은 머리 본드도 안 될 건 없겠다.
다음이 헨리 캐빌이다. 신세대 슈퍼맨이면서 최근 신판 0011 나폴레옹 솔로를 연기했던 그 배우. 영불해협에 위치한 채널 제도 출신, 32세. 앞서 2005년 크레이그와 본드 자리를 놓고 격돌했으나 당시 22세로 너무 젊었던 데다 그때는 새로운 본드영화의 캐릭터 전개 상 캐빌처럼 잘생긴 본드보다는 크레이그처럼 우락부락하고 와일드한 본드가 더 필요했기 때문에 발탁되지 못했다. 그러나 크레이그 이후의 차기 본드로서는 영화의 방향이 다시 바뀔 수 있으므로 대단히 유리해졌다.
세 번째는 신세대 매드 맥스 톰 하디다. 잉글랜드 출신, 38세. 차기 본드로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고 있고 본인도 본드 역할에 흥미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하디 역시 차기 본드 역을 맡기에는 너무 유명한 것 아닌가 싶다.
이밖에도 물망에 오르는 배우들로는 톰 히들스턴(잉글랜드, 34, ‘어벤저스’ 시리즈의 로키역) 앤드루 링컨(잉글랜드, 42, TV시리즈 ‘워킹 데드’의 주인공) 데이비드 컴버배치(잉글랜드, 39. TV영화 ‘셜록 홈스’ 타이틀롤) 리처드 아미티지(잉글랜드, 44, 영화 ‘호빗’의 토린 오큰쉴드역) 등이 있다.
대부분 고만고만한 배우들. 이들보다 좀 더 유명한 축으로는 콜린 패럴과 유안(우리나라에서는 이완으로 알려졌다) 맥그리거도 있다. 과연 누가 차기 본드로 낙점돼 팔자를 고칠까.
김상온(프리랜서 영화라이터)
[김상온의 영화이야기] (47) ‘차기 본드’를 찾습니다
입력 2015-11-30 14:54 수정 2016-01-05 09: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