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어린 임금을 비롯해 다른 사람들의 자식 수백여명의 목숨은 빼앗아도 용서되는 것일까. 국립창극단의 신작 ‘아비, 방연’(11월 26일~12월 5일)은 지독하게 이기적인 부성애에 면죄부를 주고 있다.
작가 한아름과 연출가 서재형 콤비가 내놓은 ‘아비, 방연’은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한 뒤 단종을 강원도 영월로 귀양 보냈을 때 호송을 담당하고, 유배중이던 단종에게 사약을 가져갔던 의금부도사 왕방연을 소재로 한 팩션 창극이다. 그는 ‘조선왕조실록’의 숙종실록과 영월지방 사료인 ‘장릉지’에 짧게 이름만 언급됐을 뿐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한아름은 왕방연이 원래 단종의 충직한 신하였지만 단종 복위를 꾀하던 송석동과 혼약한 외동딸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주군을 버렸다는 이야기로 풀어냈다.
의금부도사인 왕방연은 딸을 살리기 위해 괴롭지만 수양대군의 측신인 한명회와 봉석주의 잔인한 명령을 무조건 따른다. 그래서 단종을 유배시키고 돌아온 뒤 사육신으로 대표되는 단종 복위 운동 가담자들의 집안을 멸족시키는 일에도 나선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명회는 그의 딸을 봉석주의 노비로 줘버린다. 그는 다시 한명회의 환심을 사기 위해 사약을 들고 단종에게 간다. 그렇지만 다시 한양으로 돌아온 그가 맞닥뜨린 것은 봉석주에게 겁탈당해 정신줄을 놓은 딸이었다. 그는 딸을 업은 채 “자식을 위해 저지른 그 악행…난세의 영웅보다 아비로 살려한 나를 욕하시오”라며 말한다.
종묘사직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왕위 찬탈을 했지만 괴로워하는 인물로 그려진 세조는 그런 왕방연을 불쌍히 여겨 찾지도 말고 기록에서 지우라고 명한다. 단종 복위 운동 가담자들 및 그 가족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단종의 시신을 강에 버리라고 명령한 것은 전부 한명회가 한 짓으로 나온다.
한아름과 서재형은 이 작품에 대해 자식들을 위해 아낌없이 내주는 평범한 우리 아버지들의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가족을 위해 자신의 신념을 꺾을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고통은 크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아무리 팩션이라도 이 작품에 드러난 한아름과 서재형의 역사의식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저 애절한 부성애를 그려내기 위한 장치로 세조의 왕위찬탈을 활용했다고 보기엔 역사의 무게감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창작자의 원래 의도는 아니었다고 해도 역사에서 소재를 구한 작품의 내용은 자연스럽게 알레고리로 받아들여지는 법이다. 특히나 요즘처럼 역사 문제에 민감한 시기에는 더더욱 작품에 투영돼 해석될 수밖에 없다.
가족애와 충절이 충돌했을 때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는 관객의 몫이다. 다만 이 작품은 정의와 신념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보다 나와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요즘 세대의 의식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게다가 서재형과 한아름의 관점대로라면 가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악행을 저질렀다고 항변하는 친일파 등 변절자들에 대해서도 우린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지게 된다.
'아비, 방연' 리뷰-지독하게 이기적인 부성애에 불편
입력 2015-11-29 17:11 수정 2015-11-29 1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