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기자-강창욱] 독불장군 된 경찰청장

입력 2015-11-23 20:11

강신명 경찰청장은 23일 오전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지난 14일 시위대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농민 부상은) 사실관계와 법률관계가 불명확하다. 결과가 중한 것만 가지고 잘잘못을 판단하는 건 이성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새정치민주연합 유대운 의원이 농민 부상과 관련해 “사과할 용의가 없느냐”고 재차 물은 데 대한 답변이었다. 강 청장은 신중론으로 ‘사과 거부’ 의사를 밝힌 것이다.

사과 미루는 경찰

사실관계가 불명확하다는 경찰의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백씨가 물대포에 머리 등 상체를 정면으로 맞고 쓰러지는 영상은 지금도 여러 버전이 인터넷에 떠돌고 있다. 경찰은 이미 자체 녹화영상으로도 그 사실을 확인했다. 백씨가 쓰러진 뒤에도 물대포를 쐈다는 사실까지 인정했다. 그런데도 “사실관계를 정확히 확인해봐야 한다”며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니 의아할 따름이다. 백씨가 경찰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뒤 중태에 빠진 사실이 확인됐는데 무슨 사실을 더 확인해야 한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영상물 분석을 맡겼는데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며 시간을 끌고 있다. 강 청장은 안행위 전체회의에서 “TV 화면만 가지고는 작업에 한계가 있다. 각 방송사에 원본을 요구했지만 협조가 잘 안 되는 실정”이라고도 했다. 엉뚱한 곳에 책임을 넘기고 있는 것이다. 가능한 한 결론 내기를 지연시키면서 뭐든 책임을 벗겨줄 만한 단서나 논리를 찾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백남기’라는 아킬레스건

경찰은 백씨 부상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면 과잉 진압을 인정하는 꼴이 될 거라고 우려하는 듯하다. 상대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고 싶지 않을 것이다. 다 아는 ‘폭력 시위’ 사실을 지겹도록 강조하며 촌스러운 여론몰이를 하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로 보인다. 시위대의 폭력이 부각된 상황에서 백씨는 경찰에 유일하지만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다.

사람은 아픈 약점일수록 그것을 숨기기 위해 더욱 필사적이 된다. 구은수 서울지방경찰청장은 ‘민중총궐기 대회’ 다음날인 15일 기자 간담회를 자청해 과잉 진압 논란을 일축하려 했다. 쟁점은 역시 백씨 사례였다. 백씨가 중태에 빠지지 않았다면 기자 간담회도 없었을 것이다. 구 청장은 기자들 입에서 ‘농민’이라는 말만 나오면 “우리가 농민인 걸 알고 쐈느냐”며 과민 반응을 보였다. 그 농민이 얼마나 신경 쓰였는지 번번이 질문의 취지를 읽지 못했다. 백씨 부상에 경찰 책임도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 그는 지금의 강 청장과 마찬가지로 신중론을 폈다. “안타깝게 생각한다. 쾌유를 빈다”는 입장도 똑같다.

당시 구 청장은 백씨 상태에 대해 “수술이 잘됐다. 안정을 되찾고 있다”고 했다. 그 백씨는 14일 밤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뒤로 23일 오후 5시 현재까지 한 번도 의식을 되찾은 적이 없다. 병원 측도 그가 위중한 상태라고만 말해왔다. 구 청장이 무슨 근거로 백씨가 회복 중이라고 말했는지 알 수 없다. 백씨 문제가 과잉 진압 논란을 더 이상 부채질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만은 분명하다.

발 밟아도 사과하는데

경찰은 백씨 사례를 정당한 작전 중에 벌어진 불의의 사고쯤으로 본다. 고의성이 없었다는 경찰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더라도 책임을 벗을 수는 없다. 만원 지하철 안에서 남의 발을 밟거나 빗길에 우산을 잘못 움직여 행인 눈을 찔러도 사과하게 마련이다. 자신에게 달려든 사람을 때린 경우라도 코뼈가 부러질 정도로 다쳤다면 그 점에 대해서는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최근에는 자기 집에 침입한 도둑을 때려 뇌사에 빠뜨린 20대 남성이 정당방위를 주장했음에도 1심 법원은 징역 1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경찰은 백씨에 대해 “안타깝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이 말은 책임을 인정하는 말이 아니다. 자신과 상관없는 일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이다. 오히려 제3자의 비극에 대해 공감이나 위로의 심정을 드러내는 말로 적합하다. 강 청장은 유 의원이 계속 추궁하자 “인간적인 면에서는 그런 불상사에 대해 경찰청장으로서 대단히 안타깝게 생각하고 쾌유를 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안타깝다’와 ‘쾌유를 빈다’는 사과의 언어가 아니다.

경찰은 농민 부상에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살수차가 물을 뿜을 때 전방 카메라는 앞을 제대로 못 본다. 살수차는 백씨가 쓰러진 뒤에도 최소 15초간 물기둥을 내리꽂았다. 경찰은 이런 장비를 그동안 각종 시위 진압에 사용하면서 위험 관리 인력도 두지 않았다. 그렇다면 경찰은 적어도 “그 점에서 경찰도 책임이 있다”고 말해야 옳다. 책임 회피에 급급한 경찰이 과연 경찰 장비와 현장 지휘 체계의 허점을 개선하려 들지 의문이다.

독불장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 청장은 온건하고 합리적인 인물로 평가돼왔다. 그런 사람이 지금은 더없는 ‘독불장군’이 됐다. 이날 안행위 전체회의에서는 야당 의원들의 공세에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되레 맞서 설전을 벌였다. 지적을 겸허히 수용하던 평소와 딴판인 모습에 경찰 직원들도 놀랐다. 수장이 이렇게 강경하니 다른 목소리가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경찰 내부에도 14일 집회 이후 경찰 대응이 과하다는 의견이 있다.

강 청장이 이제 와서 입장을 무를 것이라고 기대하긴 어렵다. 애초부터 그의 손을 떠난 문제였을 것이다. 둘러보면 강 청장 혼자 ‘불법 시위’를 규탄하는 게 아니다. 황교안 국무총리부터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김현웅 법무부 장관, 강 청장의 고등학교 선배인 김수남 검찰총장 내정자까지 일사분란하게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 일련의 장면에선 확고한 청와대의 의중이 보인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