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신 스틸러(scene stealer)’라는 말이 유행하더니 요새는 ‘심 스틸러(心 stealer)’라는 말까지 나왔다. 영화에서 주연을 제치고 화면을 장악해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조연을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이제는 눈길을 넘어 마음까지 휘어잡을 만큼 비중이 커진 조연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영화에 이름이 나오는 크레딧에는 보통 ‘co-starring(공동주연)’으로 표현되지만 아무래도 주연, 즉 leading actor에는 손색이 있는, 그러나 없어서는 결코 안되는 게 조연, 곧 supporting actor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삶이라는 ‘영화’의 주연이지만 어떤 식으로든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의 삶을 그린 ‘영화’에 조연으로 참여하게 마련이다. 하긴 꼭 그런 철학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세상만사가 주연 또는 주인공만으로 이뤄질 수는 없다. 비중 있는 조연은 물론이고 스쳐지나가는 단역, 또는 엑스트라도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그러다보니 조연배우를 일컬어 ‘약방의 감초’라는 관용표현도 생겨났거니와 조연 전문 배우도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조연전문 배우는 때로 주연으로 신분이 상승하기도 하고 때로는 주연 못지않게 글자 그대로 관객의 눈과 마음을 훔치는 ‘신 또는 심 스틸러’로 불리기도 한다.
조연배우도 주연배우와 마찬가지로 대개는 ‘전문분야’가 있다. 악역이라든지 코믹한 역이라든지 주책바가지역이라든지 하는 따위다. 하지만 조연은 또한 주연과 달리 이런 저런 역을 모두 소화해내야 하는 팔방미인이어야 하기 때문에 ‘성격배우’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다. 이른바 ‘연기파’ 배우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주연급이 연기력보다 인기에 더 매달린다면 조연급은 연기력이 더 큰 무기가 된다는 얘기다.
우리 배우 가운데는 고 김희갑 선생이 대표적 조연배우다. 그는 ‘합죽이’라는 별명이 붙은 우습게 생긴 외모로 코믹한 역부터 눈물을 자아내는 신파연기, 그리고 주인공의 주위를 맴도는 온갖 보조적인 역할로 일세를 풍미했다. 물론 ‘팔도강산’에서처럼 당당한 주연으로 전국민의 시선을 모으기도 했다.
할리우드에서는 어떨까. 1930년대부터 주로 서부극에 단골로 출연하면서 두 차례나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월터 브레넌을 최고의 조연배우로 꼽는 이들이 많지만 토머스 미첼을 지목하는 영화사가들도 많다. 우리나라 관객들에게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비비안 리의 아버지역으로 많이 알려진 넉넉한 체격의 배우다.
이외에도 에롤 플린, 로버트 테일러 주연의 중세 사극에서 악역을 많이 맡았던 베이질 래드본과 진지한 영화에서 진지한 조연을 많이 한 조지 샌더스와 아서 케네디, 칼 몰든, 그리고 브레넌처럼 서부극 단골 벤 존슨도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훌륭한 조연 배우들이다.
이들의 뒤를 이어 주연과 조연을 오가며 연기력을 뽐낸 도널드 서덜랜드-클린트 이스트우드와 함께 출연해 베트남전의 마약에 찌든 히피 병사를 2차 대전 배경으로 옮겨 기가 막히게 연기한 ‘켈리의 영웅들(Kelly's Heroes, 1970)’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를 필두로 ‘엑소시스트(1973)’에서 늙고 추레한, 그러나 살인범을 끈질기게 쫓는 킨더만 형사역을 멋지게 소화해낸 리 J 콥, 무슨 역을 맡겨도 믿음직한 마틴 발삼과 일라이 월라크, 그리고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면서도 조연을 마다않고 ‘사상 최강의 조연’으로 이름을 날린 어네스트 보그나인 등은 조연이지만 톱스타 대우를 받아 마땅하다.
좀 더 현재 쪽으로 오면 당초 주연인 데이비드 니븐을 받쳐주는 조연으로 출발했으나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일약 주연으로 올라서 몇 편의 후속편까지 찍으면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핑크 팬더’ 시리즈의 클루조 형사역 피터 셀러즈와 사상 최고의 악역 가운데 하나로서 마치 그가 주연인 것처럼 관객들의 눈길을 빼앗았던 ‘쉰들러 리스트(1993)’의 나치 수용소장역 롤프 파인즈, 마피아영화에 자주 등장해 작은 몸집에도 마치 제임스 캐그니처럼 암팡진 연기를 보여준 조 페치 등이 있다. 이들 역시 출발은 조연이었으나 주연급으로 성장한데 더해 연기력과 인기 측면에서도 주연배우들 못지않다.
이와 함께 딱히 조연배우라고 규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훌륭한 조연배우가 ‘성격배우’라는 의미에서 볼 때 훌륭한 성격배우의 리스트를 보면 좋은 조연배우와 겹치는 수가 많다. 그중 인터넷에 떠도는 ‘최고의 성격배우 20인’을 소개한다. 여배우는 딱 한사람밖에 포함돼있지 않고, 주연급도 있는데다 국내 팬들이 잘 모르는 낯선 이름들도 섞여있지만 이들이 누군지, 어떤 영화에 출연했는지 찾아보는 것도 흥미롭겠다.
(20)빈센트 스키아벨리 (19)로버트 쇼 (18)제임스 크롬웰 (17)윌리엄 샌더슨 (16)M 에메트 월쉬 (15)존 말코비치 (14)샘 엘리어트 (13)하비 키틀 (12)피터 로레 (11)매기 스미스 (10)포레스트 휘태커 (9)브래드 다우리프 (8)조 페치 (7)클로드 레인스 (6)크리스토퍼 월큰 (5)폴 지아매티 (4)스티브 부세미 (3)존 터투로 (2)크리스토퍼 로이드 (1)게리 올드먼.
김상온(프리랜서·영화라이터)
[영화이야기] (46) ‘약방의 감초’에서 ‘심스틸러’로
입력 2015-11-23 13:02 수정 2015-11-23 1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