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지지율이 90%에서 8%로… 문민정부의 공과

입력 2015-11-22 09:26
시작은 창대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5·16 군사정변 이후 32년 동안의 군사정권을 종식시키며, ‘문민정부’ 간판을 내걸고 화려하게 임기를 시작했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 강력한 국민적 지지를 바탕으로 개혁과 부패 일신 정책을 펼쳤다. 역사바로세우기를 천명, 금융실명제로 군사정권 인사들의 차명계좌를 동결시키고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를 해산했다. 각 교과서에 군사혁명으로 기술된 5·16 군사정변을 쿠테타나 정변으로 고치게 했다.

임기 후반에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수수를 폭로하게 한 뒤, 광주학살과 12·12 군사반란의 책임을 물어 구속수감시키기도 했다.

일제 침략의 상징인 옛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개칭했으며 전국 곳곳에 일제가 박았던 쇠말뚝을 뽑아 과거사 청산에도 의욕적으로 앞장섰다.

지방자치제도를 확대·시행해서 ‘풀뿌리 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받으며 이듬해에는 대한민국이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 일본에 이어 아시아의 두 번째 가입국이 되는 쾌거를 올렸다.

북한 김일성 주석과의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며 성사 직전까지 갔으나 김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취소되기도 했다.

개혁의 칼을 휘두르며 순항하던 ‘문민정부호’도 임기 후반에는 암초에 부딪히며 좌초의 위기를 겪는다.

고인은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으며 ‘IMF 대통령’이라는 낙인이 찍히기도 했다. ‘소통령’이라고 불린 차남 김현철과 홍인길 전 청와대 수석 등 측근들이 연루된 권력형 비리사건도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 안기부(현 국가정보원)의 정치개입 금지를 골자로 한 안기부법 개정을 단행하는 등 정보정치와 거리를 두는 듯했다. 그러나 해체됐던 도청 조직인 미림팀이 부활해 여당 및 주요인사들의 동향을 도·감청했던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이 안기부의 예산을 선거 자금으로 사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안풍’ 사건도 고인의 과오로 남아 있다. 다음 정권인 김대중 정부 시절, 대법원은 “피고인 김기섭이 선거자금 등으로 지원한 1197억 원은 안기부 예산이 아니라 피고인이 은밀히 관리하던 김 전 대통령과 관련된 정치자금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결했다.

일본에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강경발언을 하기도 했지만, 한국 어선이 나포되는 등 긴장이 고조되자 일본이 제시한 잠정공동수역안을 받아들여 독도영유권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정권 초반 90%대까지 치솟았던 고인의 지지율은 임기 마자막 해에 8.4%를 기록하며 당시까지 재임했던 대통령 가운데 최저치를 받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2011년 미국의 폭로 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는 김 전 대통령에 대한 미국 대사관의 평가를 공개했다. 이 문서에서는 고인을 “다혈질적인 성격과, 보수적 정치 이념을 갖고 있으며, 정책현안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김의구 기자 e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