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의 일생] 개구장이 섬소년, 대통령이 되다

입력 2015-11-22 09:17
김 전 대통령은 제1공화국에서 6공화국에 이르는 한국헌정사의 산증인이자, 중요한 고비때마다 용기 있는 결단으로 정치 행로를 바꿔온 한국 정치사의 상징이다. 최연소(25세)·최다선(9선)의원, 최초의 문민 대통령 등 누구 못지 않은 화려한 이력을 뽐냈으며, 1998년 퇴임 이후에도 꾸준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개구장이 섬소년, 최연소 국회의원 되다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20일 거제도에서 부친 김홍조(2008년 별세)씨와 모친 박부연(60년 별세)씨 사이에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멸치잡이 어장을 소유한 부친 덕에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자랐다. 목이 마르다고 논물을 실컷 마셨다가 어머니로부터 회초리를 맞는 등 어린 시절 그는 천진난만한 개구쟁이였다. 정치에 투신한 후 그가 보여준 낙천적 성격도 이 시절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승부사 기질도 남달랐다. 씨름을 하면 머리 하나 더 큰 형들이 기가 질려 도망가게 만들 정도였다고 김 전 대통령 오랜 친구들은 전한다. 외포소학교를 졸업한 뒤 43년 입학한 통영중학교에선 한국 학생들을 차별대우를 하던 ‘기타지만 수이치로’라는 일본인 교장을 골탕먹였다가 무기 정학을 당하는 유명한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해방 후 그는 부산의 경남중학으로 전학했고, 널리 알려진 대로 이 때부터 책상머리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써붙여 놓고 정치지도자로서의 꿈을 키웠다. 48년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에 입학하면서 그는 꿈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특히 대학 2년 때는 서울 명동서 열린 정부수립기념 웅변대회에서 2등으로 입상한 것을 계기로 당시 외무장관이던 장택상씨와 인연이 맺어져 정계진출의 기회를 잡았다. 6·25 전쟁 이후 그는 국회부의장이 된 장씨의 비서로 발탁됐고, 장 부의장이 52년 2월 국무총리가 되자 다시 총리실로 옮겨 인사담당 비서관이 된다. 이때부터 그는 고향사람들에게 안부편지를 띄우는 등 정계진풍의 의지를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이듬해 9월 장 총리가 총리직을 사임하자 김 전 대통령은 54년 5월 실시된 3대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 고향인 거제로 돌아온다. “나라를 흔드는 사람들을 무슨 재주로 당하겠느냐”는 부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출마결심을 굳힌 그는 당시 자유당 총무부장이던 이기붕씨의 입당교섭에 따라 자유당 공천을 받아 만 25세의 최연소기록으로 당선됐다. 최연소 당선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이때부터 그는 대변인 2번, 원내총무 5번 등 숱한 기록을 남기게 된다.

영욕의 국회 생활

초선 당시 자유당 소속이었던 김 전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이 3기 집권을 위해 ‘사사오입개헌’을 강행하자 과감히 반대표를 던지고 입당 7개월만에 탈당을 감행한다. 야당 의원으로 새출발을 시작한 그는 신익희·조병옥 등 야당원로 밑에서 정통 야당을 이끌어갈 역량을 쌓게 된다. 4대 총선 때는 ‘여촌야도’ 현상을 좇아 고향인 거제를 떠나 부산서구에 출마했지만, 자유당의 필사적인 부정선거 공작으로 패배의 쓴잔을 마시게 된다. 하지만 그는 60년 4·19로 자유당정권이 무너진 뒤 과도정부에 의해 치러진 5대 총선에서 무난히 원내복귀에 성공한다. 이후 그는 부산서구에서 80년 5·17 조치로 정치규제에 묶인 기간을 제외하고 모두 일곱번이나 당선된다.

그가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한일외교반대시위가 한창이던 65년 최연소 기록으로 야당인 민중당의 원내총무를 맡으면서부터였다. 그후 67년 그는 통합야당인 신민당의 원내총무를 맡았다.

시련도 있었다. 그가 정치적으로 한껏 목소리를 높여가던 60년 9월 모친 박부연씨가 무장간첩의 총탄에 살해된데 이어 이듬해에는 5·16혁명으로 정치활동이 전면 금지되기도 했다. 또 69년 신민당 원내총무로 박정희 대통령 삼선개헌 반대투쟁에 앞장섰던 그는 집 앞에서 괴한들로부터 초산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40대 기수론

초산테러 사건 이후 그는 박 대통령에 맞설 수 있는 야당의 핵심 지도자로서 위치를 굳혔으며, 곧이어 ‘40대 기수론’을 제창, 당시 3선 개헌저지 실패로 침체의 늪에 빠진 야당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70년 9월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평생의 라이벌인 김대중씨에게 패배한다. 자신의 제창으로 시작된 ‘40대 기수론’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좌절을 겪은 것이다.

72년 10월 유신 이후 개헌운동을 추진하던 그는 74년 당시 유진산 총재가 타계하자 정계입문 20년만에 최연소 제1야당 총재를 맡게 된다. 그는 신민당을 개헌추진본부체제로 전환, 전국적 개헌운동을 벌여나갔으며, 이 때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로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갈증을 달래주기도 했다.

76년 5월 열린 소위 ‘각목 전당대회’에서 이철승씨에게 당권을 빼앗기며 좌절을 겪은 그는 유신말기인 79년 5월30일 신민당 총재 선출을 둘러싼 당권경쟁에서 대의원수의 절대적 열세와 중앙정보부의 공작을 뒤엎고 총재에 다시 선출됨으로써 정치적 재기에 성공했다.

단식투쟁, 3당합당, 대통령 당선

총재 취임 후 2개월만에 유신체제와 정면승부에 기름을 끼얹는 사건이 터진다. 이른바 YH사건이다. YH여공들이 신민당사로 찾아와 폐업반대 농성을 벌이면서 시작된 이 사건은 경찰의 강제해산으로 끝났으나, 이로 인해 정국은 초긴장 상태에 돌입하고 끝내 국내 정당사상 처음으로 법원의 결정에 의해 총재직무가 정지되고 뒤이어 의원직마저 빼앗기는 첨예한 대결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의원직 제명 때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고 잠시 죽는 것같지만 영원희 사는 길을 택할 것’이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10·26사태로 박정희 정권이 종지부를 찍었지만, 그에게 80년 ‘서울의 봄’은 너무나 짧았다. 12·12사태로 군을 장악한 신군부의 등장으로 그는 다시금 침묵을 강요당하는 연금상태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83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목숨을 건 23일간의 단식투쟁에 돌입하는 승부사다운 결단으로 파국으로 치닫던 정치의 흐름을 일시에 뒤바꿔놓는 계기를 마련한다. 84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하고, 85년 신민당창당과 ‘2·12’ 총선의 돌풍의 주역으로 다시 등장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으로 실시된 87년 대선에서 집권기회를 맞는 듯 했으나 야권후보 단일화에 실패, 한발짝 앞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듬해 4월 실시된 총선에서는 제 1야당의 자리마저 ‘김대중의 평민당’에 넘겨주어야 하는 쓰라림을 맛보아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90년 1월 그는 ‘구국의 결단’이라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민정·민주·공화 등 3당 통합을 결행, 여당으로 탈바꿈함으로써 대권을 향한 마지막 승부수를 띄운다. 여소야대의 4당 구조를 종식시키고 여권의 ‘2인자’로 변신한 것이다. 3당 합당 직후 내각제 개헌 파동이 불거지면서 당내 이질적인 정치세력간 갈등은 첨예화됐고, 내각제개헌 합의 각서가 공개되자 당무를 거부하고 마산으로 내려가기도 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내각제 개헌을 접으면서 파문은 가라앉았지만, 민자당은 그때부터 후보 선출 방법과 시기를 둘러싸고 내홍에 빠졌다. 하지만 그는 특유의 저돌적 밀어붙이기로 난관을 돌파, 결국 지난 92년 전당대회 경선을 통해 집권 여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고 끝내 그해 12월 14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며 오랜 꿈을 이룬다.

김영석 정치부장 y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