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기자-강창욱]사람 인생이 걸렸는데 "마음대로 쓰라"는 경찰

입력 2015-11-19 19:48

“기자들이 생각하는 대로 써라.”

18일 경찰은 이슬람 테러단체 추종 혐의가 있다며 체포한 인도네시아인 A씨(33)에 대해 설명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 기자가 “그의 자택에서 압수했다는 이슬람 서적이 (보도자료 내용대로) 정말 원리주의 서적이 맞느냐”고 묻자 수사 책임자가 “잘 모르겠다”며 덧붙인 말이다. 경찰청은 앞서 배포한 자료에서 ‘이슬람 원리주의 서적 다수를 증거물로 압수했다’고 강조했다.

“생각하는 대로 쓰라”는 말은 “마음대로 쓰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경찰은 해당 서적이 뭔지 설명하지 않았다. 제목도 모르는 책에 대해 알아서 판단을 하라는 말은 성립할 수 없다. 한 사람이 ‘잠재적 테러리스트’가 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면서 어떻게 이처럼 무책임하게 말할 수 있는가.

A씨가 ‘테러단체 추종자’라며 경찰이 밝힌 증거와 논리는 빈약하기 짝이 없다. 증거는 그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린 시리아 반군 ‘알 누스라 전선’의 깃발과 그 문양이 새겨진 모자 사진이 사실상 전부다. 알 누스라의 테러 활동을 적극 옹호하는 발언은 없다. 그럼에도 경찰은 그의 집에서 나온 ‘람보칼’과 BB탄 소총, 밀리터리룩(군복 디자인을 차용한 의류) 등을 제시하며 잠재적 테러리스트라는 인상을 강하게 풍겼다. 웬만한 군사 마니아의 집을 뒤지면 이 정도 물건은 나온다.

그동안 경찰은 ‘청와대 폭파 협박’ 사건 등이 불거질 때마다 언론이 불안감을 조성한다며 인상을 구겼다. 그런 경찰이 뭐가 급했는지 A씨를 잡자마자 자료를 배포하고 브리핑까지 자청했다. A씨는 물론 그의 주변인에 대한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가 정확히 어떤 인물인지 파악하지 않은 채 SNS 게시물 몇 건만으로 ‘위험인물’이라고 발표한 것이다.

경찰이 A씨를 체포한 근거는 출입국관리법 위반(불법체류), 위조사문서 행사(위조여권 사용), 총포·도검·화약류 단속법 위반(람보칼·모의소총 소지)이다. 그가 체포된 건 테러단체 추종자라서가 아니라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이다.

경찰은 테러 관련법이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테러 관련법이 있더라도 이 정도 정황만으로 사람을 처벌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테러 관련 혐의를 적용한다면 더욱 신중해야 한다. 공포감이 고조되면 생사람을 잡을 우려가 있다.

경찰은 A씨 검거로 테러 발생 가능성을 막은 것처럼 말한다. 그렇다면 먼저 그가 정말 잠재적 테러리스트가 맞는지 한 치 의심도 없는 수준으로 확인돼야 한다. 그의 인권을 생각해서만이 아니다. 이 문제는 한국이 과연 테러로부터 안전한지 확인하는 척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법체류자 A씨에 대한 조사는 강제 추방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경찰은 잠재적 테러 위협을 막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진실은 확인할 수 없게 된다. 경찰로선 손해 볼 게 없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