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 스펙터’, 제임스 본드의 힘겨운 ‘원맨쇼’

입력 2015-11-16 00:03 수정 2015-11-16 11:19
영화 ‘007 : 스펙터’ 스틸컷

* 이 기사에는 영화의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팬들의 열광 속에 이어져온 시리즈 영화들은 회를 거듭하면서 종종 난관에 부딪친 모습을 보여 주곤 한다. 시대의 요구에 맞춰 새롭게 변하느냐, 기존의 분위기를 그대로 유지하느냐의 딜레마다. 최근에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주인공이 외부의 적 외에 자신의 내면이나 몸담은 조직 내부에서 겪는 갈등을 전면에 돌출시키는 타협안이 제시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시리즈 50주년 이후 첫 공개된 24번째 영화, ‘007 : 스펙터’는 한 번도 밝혀진 적 없는 주인공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의 과거를 말하려 한다.

‘미션임파서블 : 고스트 프로토콜’의 IMF가 해체 고비를 겪었던 것처럼 ‘007’의 MI6도 ‘나인 아이즈’에 흡수 합병될 위기에 처했다. 여기서 ‘나인 아이즈’란 지난 2013년 전 CIA 직원 에드워드 스노든의 폭로로 만천하에 알려진 영미권 5개국 정보협력체 ‘파이브 아이즈’에 대한 패러디로 보인다. 영화 속 ‘나인 아이즈’는 실제 ‘파이브 아이즈’와 비슷하게 영국 정부의 주도 아래 8개 국가와 정보 기구 시스템을 통합해 테러리즘 등의 정보를 공유할 목적으로 조직된다.

이 와중에도 제임스 본드는 전편에서 사망한 선대 M(주디 덴치)의 유지에 따라 한 범죄 조직을 쫓기 위해 멕시코에 간다. 그가 사고를 안 치고 넘어갈 리가 없다. 격전 끝에 악당 스키아라를 제거하고 ‘하얀 왕’이라는 단서를 얻었지만 도심도 엉망진창으로 파괴됐다. 이로서 본드는 정직 처분을 받는다. 국가안전보장센터의 C(앤드류 스캇)는 한 술 더 떠서 ‘00 에이전트’들로부터 살인 면허를 박탈하고 드론을 쓰자며 MI6를 몰아붙인다. 매정하게도 조직은 본드의 몸속에 위치는 물론 생체 반응도 감지할 수 있는 ‘스마트 블러드’를 장착한다. 손발이 묶인 상황이지만 무기담당관 Q(벤 위쇼)의 도움으로 3일 남짓의 시간은 벌게 된 본드.

선대 M의 말대로 스키아라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본드는 ‘하얀 왕’에 대한 새로운 단서를 찾게 된다. ‘하얀 왕’은 ‘카지노 로얄’과 ‘퀀텀 오브 솔러스’의 악당 미스터 화이트(예스퍼 크리스텐센)였으며, 조직 ‘스펙터’의 일원이던 그는 배신자로 낙인 찍히는 바람에 은둔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본드는 비참하게 죽어 가던 미스터 화이트에게 ‘스펙터’의 비밀을 알고 있는 딸 매들린 스완(레아 세이두)의 소재를 확인한다. 매들린을 지켜 주겠다는 약속과 명예롭게 죽을 수 있는 권총을 건네면서.

본드는 고아가 된 자신의 후견인이었던 프란츠 오버하우저와 ‘스펙터’ 사이의 연결고리를 추적하다가 여태껏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이 조직의 수장이 누구였는지를 알게 된다. 에른스트 스타브로 블로펠드로 알려진 ‘스펙터’의 수장은 프란츠 오버하우저의 아들 한스 오버하우저(크리스토프 발츠)였다. 아버지가 자신보다 본드를 사랑한다고 믿어 왔던 그에게 본드는 다른 새의 알들을 밀어 내고 둥지를 차지하는 습성을 가진 뻐꾸기와도 같을 뿐이었다. 한스는 프란츠를 죽이고 스스로도 사망한 것처럼 꾸민 후 ‘스펙터’의 우두머리가 되고 만다.

한스는 “네 모든 고통을 만든 것은 나”라면서 그 오랜 시간동안 본드를 괴롭혀 왔음을 고백한다. 아주 당연히 본드와 사랑에 빠진 매들린 역시 한스에 의해 죽음의 위기에 몰린다. 그리고 물어볼 것도 없이 본드는 매들린을 구해 낸다. 또 ‘스펙터’에게 조종당했던 C 역시 자연스럽게 제거되며 MI6는 제자리로 돌아온다. “‘살인 면허’는 ‘살인 안 하는 면허’”라는 메시지를 남긴 채로. 그렇게 24번째 ‘007’의 막을 내리며 애스턴마틴 DB10을 타고 유유히 사라지는 본드와 매들린의 모습은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차 안에서’를 떠올리게 한다.

이 길고 긴 이야기가 148분의 영화 한 편에 압축되기는 아무래도 무리였던 듯하다. ‘007 : 스펙터’는 제임스 본드의 전사도, 리부트 이후 ‘007’의 역사도, 그 이전의 분위기도 담아내려 했지만 세 가지 소재를 조화롭게 살려내지는 못한 모양새다. 탄탄한 각본과 새로운 시도를 통해 시리즈 사상 최고의 흥행을 이룬 전편 ‘007 : 스카이폴’의 샘 멘데스 감독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본드의 과거에 대한 부분을 보자. 본드의 후견인 프란츠 오버하우저의 아들을 ‘스펙터’의 수장으로 설정했던 점은 흥미로웠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들이 한번도 다뤄진 적 없음을 전제하고 있음에도 설명과 묘사는 지나치게 부족하다. 기실 한스는 본드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뺏겼다고 믿는 처연한 인물임에도 이 같은 사연이 영화 속에서 최소화되는 바람에 그저 007을 질투하는 미치광이가 돼 버렸다. 게다가 ‘007’ 시리즈 최악의 범죄 조직을 이끄는 한스 오버하우저는 맥이 없었다. 마치 영화 ‘아이언맨3’에서 원작 속 토니 스타크 최고의 상대였던 슈퍼 빌런 만다린이 삼류 연극배우로 전락했던 것처럼. 그 커다란 조직이 이토록 힘없이 무너질 일인지 의아함이 가시질 않는다. ‘스펙터’는 ‘007’ 리부트 시리즈 특유의 거대 폭발 장면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던 것일까. 영화의 시작을 알리던 ‘The dead are alive(죽은 자가 살아 돌아온다)’라는 문구는 한스를 일컫는 말이었지만 그 무시무시함은 유지되지 못했다. 또 한스가 주도했다는 ‘본드의 모든 불행들’을 알지 못하는 관객들에게 이러한 설정은 고스란히 진입장벽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관객을 전율케 했던 스카이폴 저택의 폭발만큼 한스 저택의 무너짐도 장쾌했다. 액션 역시 나무랄 데가 없었다. 특히 멕시코 도심을 붕괴시킨 그 장면에서 헬기의 안전벨트 하나에 의지한 채 펼쳐지는 공중 격투는 모골을 송연케 했다. 광장의 건물 사이로 360도 회전하는 헬기는 SF 영화의 추격 장면을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악당을 처치한 뒤 조종간을 잡은 본드의 오만한 미소 위로 ‘007’ 주제곡이 흐를 때는 벅찬 감동도 느껴진다. 또 액션 곳곳에 묻어 있는 유머는 선대 007들에 대한 오마쥬로도 풀이된다. 액션에 진지함의 농도를 줄인 대신 ‘007’의 오랜 팬들을 만족시킬 만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영화 ‘인터스텔라’의 명대사를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우리는 길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가 튀어 나오며 웃음을 주기도 한다.

‘007 : 스펙터’는 주인공 외의 등장인물이 품고 있는 서사를 부각하는 여타 시리즈물의 추세를 완전히 역행한다. 그 결과 이 영화는 ‘007’의 고전적 느낌이 살아 있는 ‘원맨쇼’가 됐다. “방아쇠를 당기려면 확신이 필요하다”는 등 스파이와 살인 면허에 대한 애수 넘치는 변호도 있다. 그러나 ‘007 : 스펙터’의 ‘원맨쇼’가 유독 힘겨워 보이는 것은 너무 많은 캐릭터를 등장시켜 놓고 그들을 전부 들러리 이하의 용도로 썼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라효진 기자 surplu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