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2004년 2차례 정치적 시련 딛고 재기 성공” 오뚜기 최룡해, 삼전사기 가능할까

입력 2015-11-12 20:11

장성택 숙청 이후 한때 김정은 체제의 '2인자'로 위세를 떨치다가 최근 해임된 것으로 알려진 최룡해는 항일 빨치산 혁명 2세대의 대표주자다.

최룡해의 아버지 최현(1982년 사망)은 동북항일연군에서 김일성 주석을 능가했던 빨치산이자 김정일 후계체제를 적극 지지한 원로로, 3대 세습 지도자 모두와 군부의 존경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만경대혁명학원과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한 최룡해는 1960년대 후반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사로청. 현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부부장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사로청 해외교양지도국 국장과 중앙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제8기 대의원 등을 거치며 정치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특히 불과 서른여섯 때인 1986년 500만명 규모의 사로청 위원장 자리를 꿰어찬 이후 1998년까지 무려 12년간 이 거대조직을 진두지휘했다.

1996년 1월∼1998년 1월 김일성 사회주의청년동맹 제1비서로 활약했던 그는 1998년 상반기 부패한 청년동맹 간부를 대거 처형한 이른바 '청년동맹 사건'에 연루돼 해임됐다.

당시 상당수 연루자들이 처형당할 정도로 사건의 파문이 컸지만 최룡해는 부친의 후광 덕분에 평양시 상하수도관리소 당 비서로 좌천되는 정도의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그러다가 5년 후인 2003년 8월 당 총무부 부부장으로 복귀했으나 이듬해인 2004년 장성택이 분파행위로 숙청될 때 다른 측근들과 함께 다시 밀려나는 아픔을 겪었다.

그 때 최룡해는 협동농장에서 혁명화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두번의 정치적 시련을 극복하고 장성택의 도움에 힘입어 2006년 3월 황해북도 당 책임비서가 되면서 중앙 정치무대에 다시 이름을 올렸다.

최룡해는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과 개인적으로 직접적인 인연은 별로 없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럼에도 김정은 후계체제가 공식화되면서 핵심 실세로 급부상했고, 이후 당 정치국 상무위원, 국방위 부위원장, 차수, 군 총정치국장 등 노동당과 군부의 고위직을 모두 차지하며 승승장구했다.

2012년 4월에는 김정은 정권 출범과 함께 차수 계급장을 달고 군을 통제하는 최고 핵심 자리인 총정치국장에 올랐다.

그러나 작년 5월에는 김정일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참석하에 열린 강원도 원산 송도원국제소년단야영소 준공식에서 노동당 비서로 소개됐다.

총정치국장 자리를 황병서에게 내주고 공식 권력서열 6위로 내려앉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2013년과 올해 두차례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을 만나면서 여전히 김정은의 측근이자 실세임을 과시했다.

2013년 5월에는 특사 자격으로, 지난 9월에는 전승절의 북한 대표단장 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국가주석을 만나 김정은의 방중 문제 등을 논의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2전3기의 인생을 살았던 최룡해가 이번에도 시련을 극복하고 권력의 중심으로 복귀할 수 있을지는 예상하기가 쉽지 않다.

일각에서는 '충신의 전형'으로 칭송받는 부친을 뒀다는 점에서 김정은의 정통성 확보와 체제 결속에 여전히 활용 가치가 있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하지만 두차례의 '전과'가 있는데다 이번 실각이 세대교체 차원에서 단행된 것이라면 과거와 같은 재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김영석 기자 y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