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기자-강창욱] ‘국정화 호위대’ 자처한 경찰…실책 만회하고 싶었나

입력 2015-11-09 09:01 수정 2015-11-09 09:03

경찰청이 지난 6일 발표한 ‘국정 교과서 관련 불법행위 엄단’ 방침이 반대여론 진압용이라는 지적을 부정할 수 있을까. 경찰은 “폭행·협박 등에 대해 용의자를 반드시 추적·검거하겠다. 명예훼손과 모욕도 엄정히 수사하겠다”고 밝혔다.

이 엄포의 명분은 집필진 보호다. 경찰은 보도자료에서 “국정 교과서 집필진 등 관련자들에 대한 협박, 인터넷상 명예훼손 등 불법행위 우려가 매우 높아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취지로 볼 때 ‘국정 교과서 관련자’라고 할 만한 사람이 대표 집필진 2명뿐인 상황에서 “신변보호 요청이 있으면 즉시 응하겠다”는 안내까지 친절히 덧붙였다.



사태 짜 맞추는 경찰

경찰이 이토록 거창하게 나서야 할 만큼 집필진은 위태로운 상황인가. 수긍하기 어렵다. 지금 그들에게 쏟아지는 말은 온라인에서 이뤄지는 통상의 악의적 비방과 결이 다르다. 수위가 상대적으로 약할뿐더러 상당수는 공론의 성격이 짙다. 경찰이 말하는 국정 교과서 관련자 ‘폭행’은 시도된 사례도 알려진 바가 없다.

경찰은 집필진에 대한 위협이 위험 수준이라고 보는 근거로 언론 보도 4건을 들었다. 자의적 판단이 아니라고 강변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중 3건이 사태를 다소 과장한 데가 있는 보수 매체 기사였다. 나머지 1건은 다수 매체가 보도한 것처럼 기재했지만 실제로는 SBS MBN 서울경제 등 일부가 연합뉴스 기사를 받아 쓴 것에 불과했다. 경찰이 자기 정당화를 위해 언론 보도까지 선별하며 상황을 한쪽으로 짜 맞추려 한 것이다. 연합뉴스 기사는 가수 이승환 등 국정화 반대론자에 대한 공격 사례도 담고 있었다.

경찰은 집필진에 대한 ‘신상털기’를 우려한다지만 그들의 과거 행적 등을 살피는 것은 인사검증에 가깝다. 신상털기란 논란이 된 인물의 이름과 얼굴 등 개인정보를 무차별 수집해 공개하는 행위다. 최몽룡 서울대 명예교수 등 대표 집필진은 정부가 이름을 공개한 사람들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처럼 중차대한 문제에서 핵심인물 공개가 단순한 통보일 수는 없다. 이들이 적절한 인물인지에 대한 검증과 판단을 사회에 맡긴 것으로 봐야 한다.

무엇보다 피해자 고소나 요청도 없는 상황에서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에까지 경찰이 앞장서 처벌을 운운한 적이 얼마나 되는가. 정부와 무관한 문제라면 이렇게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피해자 보호를 위해 인터넷 언어폭력 등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겠다면 이보다 심한 사례, 이만큼 주목받는 사례는 널렸다.

경찰이 집필진 보호 방침을 밝힌 시점이 최몽룡 서울대 명예교수가 성추행 논란에 휩싸인 직후라는 점에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실은 어딘지 공교롭지 않다. 논란 확산을 막고자 했다면 성범죄 용의자를 감싸려 한 꼴이 된다. 경찰의 전폭적인 후방지원에도 최 교수는 물러났다.



‘집필진 구하기’는 실책 만회용?

정부가 동원한 것인지, 경찰 스스로 나선 것인지는 몰라도 경찰이 국정 교과서 사태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는 부담을 갖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최근 태스크포스(TF)’ 경찰 신고 녹취록 논란(국민일보 10월 29일자 1·3면 참고)이 벌어졌을 때 경찰은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신고 대응이나 녹취록 공개 과정에 하등 잘못이 없었음에도 본보 보도와 관련해 자신들이 조치할 수 있는 게 없는지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촌극을 보여줬다.

녹취록을 공개해 비밀 TF 의혹을 키운 셈이었으니 문책을 우려했을지 모른다(녹취록을 보면 112신고자인 TF 관계자는 추가 경비 인력을 동원하지 않으면 경찰이 문책당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놨다). 국정화 TF 측의 경찰력 동원 요청에 미진하게 대응한 사실이 드러난 게 불편했는지도 모른다. 보도 직후 경찰은 녹취록이 외부로 나간 경위를 파악해 경찰청장에게 보고했다. 그 내용이 청와대에도 전달됐으리라는 건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경찰이 보인 반응으로 봤을 때 어떤 식으로든 이 일을 만회하고 싶었을 것이다.

경찰은 시민의 자유와 권리보다 청와대의 안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정부나 대통령에 관한 문제라면 과민 반응을 보인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집회시위 현장에서의 차벽 설치와 최루액 살포, 정부 비판 전단 단속 등 논란의 여지가 농후한 대응 방식을 고집하고 있다. 집필진 명예훼손 처벌 방침을 밝히면서는 “건전한 비평·의견개진 등에 대해서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되”라고 했지만 이는 비판을 의식한 사족에 가깝다. 여기서 조건부로 수식한 ‘건전’은 경찰이 과거 미니스커트 길이를 자로 측정해 판정하던 ‘건전’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는다.

경찰은 방침을 바꿀 생각이 없다. 정부 비판을 막는 게 최우선 임무라고 굳게 믿는 듯하다. 어쩌면 정권 비호 조직이라는 세간의 평가가 그리 싫지 않은 것인지 모른다. 실속을 위해선 확실히 그 편이 나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청와대는 지금의 경찰을 어느 때보다 만족스러워하는 분위기다. 최근 김수남 대검찰청 차장의 검찰총장 내정으로 같은 고등학교 출신인 강신명 경찰청장이 퇴출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을 때 청와대는 단칼에 일축했다. “같은 고교 동문이 검찰총장과 경찰청장으로 일하게 될 경우 한 명은 물러나야 한다는 것은 관습적 사고에 불과하다. 강 청장이 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고 한다. ‘TK 독식’ 논란을 무릅쓰고 이렇게 단호하기도 어렵다.

강 청장은 이미 올해 초부터 “내년 8월까지인 임기를 모두 채울 것”이라고 말해왔다. 대통령 말 한마디면 자리를 내놔야 하는 경찰청장이 자의만으로는 할 수 없는 말이었는데도 강 청장의 의지라고만 생각했다. 경찰청장은 더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점을 잊었던 것이다. 지금껏 임기를 채운 청장은 거의 없다. ‘국정화 호위무사’를 자처하고 나선 경찰을 보면서 강 청장이 그토록 자신만만할 수 있었던 이유를 뒤늦게 알 듯하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