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에는 영화의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진실’과 ‘사실’의 차이를 아시나요? 얼핏 같은 단어처럼 보이지만, 의미의 결은 묘하게 다릅니다. ‘사실’은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같습니다. 이를테면 제가 국민일보에 근무하고 있다는 명제는 사실이죠. 그렇다면 ‘기자는 기레기다’ ‘기자는 월급 도둑이다’ ‘기자는 옳은 소리만 한다’는 말들은 어떨까요? 이 가운데 분명 ‘진실’이 있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단 하나’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영화 ‘특종 : 량첸살인기’(‘특종’)는 저마다의 시선에 따라 달라지는 진실을 우화적으로 묘사한 작품입니다. CNBS 방송국의 기자 허무혁(조정석)은 우연한 제보를 받아 살인 사건과 관련된 특종을 터뜨리지만, 그것은 이내 오보가 됩니다.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사실이 아닌 이 사건은 ‘진실’의 영역으로 발을 들입니다. 특종에 욕망을 투영하고 있는 여러 인물이 사실들을 기워 하나의 진실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죠.
최초 제보자인 클라라(엘록 프락티위)는 불법체류자입니다. 아랫집 반지하방에 살인사건 용의자가 살고 있는 것 같아도 자신의 신분이 발각될까 두려워 경찰에 신고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방송사에 전화를 겁니다. 기자에게는 취재원을 보호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클라라가 불법체류자라는 사실이 노출되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까닭입니다.
우연히 클라라의 전화를 받은 허무혁은 현장으로 가서 사실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허름한 방 안에는 선혈이 담긴 주머니, 살인사건과 관련된 기사, 수술 도구, 무기를 연상케하는 연장들이 가득합니다. 누가 봐도 수상할 밖에요. 심지어는 살인을 하면서 받은 느낌을 적은 듯한 종이도 있습니다. 허무혁은 그 종이를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그대로 살인범의 고백이 되어 특종으로 변신합니다.
하지만 허무혁이 철썩 같이 믿고 있던 ‘반지하남이 살인범이다’라는 명제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가 입수한 용의자의 글은 중국 고전 소설 ‘량첸살인기’의 한 구절이었다는 것도 밝혀졌죠. 그 와중에 일은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커졌습니다. 모든 매체가 허무혁의 단독 보도를 받아쓰고, 대중의 화제는 이 살인사건으로 귀결됩니다. 모두가 살인범이 ‘량첸살인기’를 열독한 나머지 모방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확신합니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허무혁에게 클라라는 “기자님한테는 잘 된 것 아니야? 다 속았어!”라고 말합니다.
이제 사건은 허무혁의 손을 완전히 떠납니다. 클라라는 물론이고 CNBS 보도국장(이미숙), 사업국 이사(김의성), 유 팀장(태인호)에 경찰까지 이 특종을 진실로 만들려고 합니다. 의문이 인물 한승우(김대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운명은 가혹하여 아내 수진(이하나)의 진실 역시 허무혁을 압박합니다. 이때 허무혁이 도망치려 했던 끔찍한 진실이 관객에게는 웃음을 주는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합니다. 명탐정 코난의 “언제나 진실은 하나”라는 명대사도 빛을 잃게 생겼습니다. 진실의 반대말이 거짓이라는 사실조차 무색해질 정도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진실의 끝에서, 허무혁은 웃을 수 있을까요?
‘특종’의 메시지는 매우 분명하게 전달됩니다. 오해할 여지도 없이 대사로 관객의 귀에 때려 박아 주는 점이 아쉬울 만큼이요. 보도국장은 허무혁의 특종대로 사건을 마무리하려는 오 반장(배성우)에게 “사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도하겠다”고 말하고, 한승우는 허무혁에게 “이 모든 것이 사실이 되길 바라는 게 사실이잖아요”라고 일갈합니다. 등장인물들이 사실을 소비하는 방식은 진실의 재구성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 ‘짜깁기’의 참과 거짓을 결정하는 것은 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실을 보도하는 직업인 기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던 점은 탁월했습니다. 이 영화가 폭로하는 것은 기자의 ‘기레기스러운’ 면모가 아닙니다. 뉴스 시청률이 보도를 진실로 믿고 있는 사람의 수와 비례한다는 사실이죠. 그래서인지 ‘특종’에서는 댄 길로이 감독의 ‘나이트 크롤러’의 느낌도 나네요.
화면도 매우 예쁘게 촬영됐습니다. 특히 굵은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진행된 용산 폐가 결투신은 도대체 컷을 몇 개를 딴 것인지 궁금해질 정도로 공들였더군요. 감독 이하 스태프들과 배우들의 노고가 짐작되는 대목입니다.
코미디와 스릴러의 균형을 적절히 맞춰 그 경계를 노련하게 붕괴시킨 점도 감독이 의도한 우화적 느낌을 내는데 주효했습니다. 놀랍도록 복선들이 잘 회수된 영화이기도 하죠. 그러나 주제 의식에 비해 날카로움이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야기가 품고 있는 다소간의 비현실성 때문인 듯합니다. ‘특종’의 등장인물들은 자신 앞에 놓인 증거가 객관적으로 부족함에도 이를 굳게 신뢰하는데요. 이들이 조금이라도 의심의 강도를 높인다면 이야기는 진행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나치게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가 탄생했다는 인상도 듭니다. 우화와 비현실이 일맥상통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기네요. 하지만 ‘특종’에 이를 상쇄하는 재미가 있다는 점은 믿으셔도 좋습니다.
라효진 기자 surplus@kmib.co.kr
‘특종 : 량첸살인기’, ‘진실은 언제나 하나’일까?
입력 2015-11-02 00:03 수정 2015-11-02 00: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