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가 만들어진 70년대 초·중반 나를 포함한 ‘할리우드 키드’들은 영화적 갈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는 ‘수입쿼터제’라는 이름 아래 국내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거나 국책영화를 만드는 등 ‘말 잘 듣는’ 영화업자들에 대한 일종이 포상 또는 회유책 형식으로만 외국영화의 수입을 허용하고 있던 때라 돈벌이가 안 될 듯 싶은 외국영화는 손꼽을 정도로 적게 수입됐다. 그 탓에 외국영화 팬들은 항상 ‘좋은’ 영화에 목말라 했다. 탈출구 중 하나가 주로 옛날 프랑스영화를 틀어주던 프랑스문화원이었으나 그 역시 작품 선택의 좁은 폭과 양 모두에서 한계가 있었다. 그 결과 당시 영화 팬(이라기보다 영화광)들은 화보와 함께 새 영화 소개 기사가 잔뜩 들어있던 일본 영화잡지 ‘스크린’과 ‘로드쇼’ 따위를 탐독하는 것으로 영화에 대한 기갈을 해소하곤 했다. 나도 물론 그중 한사람이었는데 그때 ‘스크린’ 잡지에서 ‘데르수 우잘라’ 기사를 보게 된 것.
일본어라고는 히라가나, 가다가나 정도만 읽을 줄 아는 실력에 가끔씩 끼어드는 한자와 영어 알파벳을 섞어가며 대충 훑어보는 식이었으니 얼마나 충실하게 내용을 이해했으랴만 영화잡지인 만큼 사진이 많이 들어가 있어 그나마 엉성하게 뜻을 꿰맞출 수는 있었다. 공산주의와 통교하는 ‘북방외교’ 따위는 꿈도 못 꾸던 시절, 아무리 일본이고 비록 합작이라지만 소련 영화를 자유롭게 시중에서 공개하고, 또 볼 수 있다니. 게다가 일본은 공산주의 블록에 맞서는 자유세계의 우방 아닌가. 어떻게 일본이 소련과 손잡고 영화를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소련 같은 공산주의 나라 영화도 마음대로 볼 수 있는 일본이 부러웠다. 우리나라도 언젠가는 저렇게 될 수 있을까.
그처럼 영화 한편 제대로 볼 수 없었던 딱한 사정에는 금과옥조 같던 ‘반공’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문화라면 종류를 불문하고 ‘왜색’이라는 딱지를 붙여 철저히 차단했던 또 하나의 타부도 당연히 한몫 했다. 그래서 세계적인 감독이요 영화작가라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구로사와 아키라의 작품들은 구경할 엄두를 못 냈다. 단지 ‘라쇼몽(羅生門, 1950)’이니 ‘7인의 사무라이(1954)’니 ‘요짐보(用心捧, 1961)’처럼 유명한 영화 제목 정도만 몇 개 알고 있었을 뿐 막상 그 영화들을 본 건 영화가 나온 지 한참 지나서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 시간이 지나 구경한 영화가 바로 장장 40년이 걸린 ‘데르수 우잘라’였다.
이 영화는 전성기를 지나 슬럼프에 빠져있던 구로사와를 절망의 구덩이에서 건져낸 작품이다. 그는 1970년 최초의 컬러영화 ‘도데스카덴(기차가 지나가는 소리-’철커덩 철컹‘의 의성어)’을 만들었으나 흥행에 참패했다. 꼭 그 때문만은 아니지만 이후 그는 자신의 예술적 능력과 재능에 대한 극심한 회의에 빠져들었고 헤어날 길 없는 절망감에 급기야 자살 시도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소련의 모스필름이 실화에 바탕을 둔 이 영화를 만들자고 제안을 해왔고, 구로사와는 일체의 영화작업에 대한 총괄권을 부여받았다. 그렇게 해서 구로사와 유일의 70㎜ 영화이자 최초의 비일본어 영화가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이듬해인 76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고, 그 뒤 구로사와는 ‘카게무샤(影武者, 1980)’ ‘란(亂, 1985)’ 등을 통해 당당히 재기에 성공했다.
‘데르수 우잘라’는 사람 이름이다. 극동 러시아 우수리강 유역에 살던 시베리아 원주민 사냥꾼. 그리고 영화는 이 원주민의 거칠 것 없는 자연 속 삶과 지역을 탐사하던 러시아군 탐험대장과 그 사이의 우정을 묘사한다. 데르수 우잘라는 한마디로 시베리아의 숲과 산을 몸으로 체현(體現)한 ‘자연인’이다. 얼핏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자유인’ 희랍인 조르바를 연상시키지만 조르바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자연과 완전히 동화된 인물이다. 그는 태양과 달, 물, 바람, 호랑이를 비롯한 모든 동물, 심지어 장작불까지 사람으로 친다. 그리고 교류한다. 영화 속에서 데르수 우잘라는 장작불과 대화하고 호랑이와도 교감한다. 그러면서 인간에 대한 정도 깊다. 어느 정도냐면 그는 ‘한번 만난 적도 없고, 앞으로 만날 일도 전혀 없는’ 사람들을 걱정한다. 그들을 위해 식량과 성냥을 숲속에 남겨두려 한다. 탐험대 안내인역을 하면서 대가를 바라지도 않는다. 아니 그런 게 있다는 것조차 모른다. 본업이 사냥인 만큼 사냥총 탄알에 대한 욕심은 있지만.
아카데미상을 받았다지만 영화 자체는 그렇게 훌륭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물론 시베리아의 숲과 황량하게 얼어붙은 대지 등을 촬영한 멋진 부분에서는 70㎜ 대형화면으로 볼 수 없는 게 안타까웠다(인터넷에서 다운받아 컴퓨터 모니터로 봤다). 하지만 영화의 내용은 그저 ‘시베리아판 조르바’ 같다는 생각만 들었다.
하긴 구로사와의 작품들은 오리지널이 있다든지, 나중에 서양에서 리메이크한 것들이 많다. 그것들을 구로사와의 본 작품보다 먼저 봐서 김이 빠져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구로사와의 영화들은 예상했던 것만큼 .감동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존 스터제스가 ‘황야의 7인(Magnificent Seven, 1960)'으로 번안한 ’7인의 사무라이‘도, 세르지오 레오네와 월터 힐이 각각 ’황야의 무법자(1964)‘와 ’라스트 맨 스탠딩(Last Man Standing, 1996)'으로 리메이크한 ‘요짐보’도, 그리고 ‘스타 워즈’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숨은 요새의 세 악인(1958)’ 등이 그렇다.
그런가 하면 구로사와는 툭하면 셰익스피어극을 일본 사극으로 번안하곤 했다. 이를테면 ‘거미의 성(蜘蛛巢城, 1957)’은 ‘맥베스’를 중세 일본으로 옮겨온 것이고, 후기의 걸작 ‘란’은 ‘리어왕’을 일본판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원작에 익숙해서인지 그것에 일본색을 입혔다는 특이함 외에 별다른 감흥은 없다. 구로사와의 이런 저런 작품에 영향 받았다든지 심취했다고 털어놓은 미국과 유럽의 유명 영화감독들이 한둘이 아닐진대 그의 영화들을 보면서 심드렁한 나는 확실히 유명 영화감독 감은 아닌 게 분명하다.
김상온(프리랜서·영화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