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 체이스(cdar chase)’-자동차 추격전. 웬만한 액션영화나 스릴러, 또는 범죄영화에는 빠지지 않는 단골 양념이다. 미친 듯 질주하는 고성능 차량의 엄청난 힘과 스피드, 그리고 현란한 곡예운전 등 묘기 백태(百態)가 전해주는 스릴감에 더해 거의 반드시 부수되는 파괴의 장관까지 관객에게 짜릿한 흥분과 쾌감을 느끼게 해주니 그럴 만도 하다.
‘분노의 질주(Fast and Furious)’ 시리즈라든가 ‘운반자’를 뜻하는 ‘트랜스포터(Transporter)’ 시리즈처럼 아예 제명에서부터 자동차 및 카 체이스 냄새가 팍팍 풍기는 영화들은 말할 것도 없다. 트랜스포터 시리즈의 경우 주인공이 무술의 달인 제이슨 스태텀이지만 눈이 어지러울 정도의 싸움 실력을 내보이는 스태텀보다 마치 그가 운전하는 자동차, 독일제 아우디(시리즈 초반에는 BMW였다)가 주연처럼 보인다. 자동차를 이용해 고객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건 운반해주는 일을 하는 스태텀은 이 자동차를 가지고 카 체이스를 비롯해 별 짓을 다 한다. 이처럼 카 체이스가 흔해지다보니 카 체이스와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연관도 없을 것 같은, 실제로 없는 영화들에도 카 체이스가 등장한다. 인간의 정체성에 관한 의문을 던지는 최근의 SF영화 ‘셀프리스(Self/less)’도 마찬가지다.
타셈 싱이 감독한 이 영화는 죽음을 눈앞에 둔 병 든 부호가 큰 돈을 주고 가난한 젊은 사람의 신체를 사서 ‘부활’한 뒤 본래 신체 주인의 기억이 되살아나자 “나는 과연 누구인가”하고 고민하다가 결국은 순리대로 죽은 사람은 죽게 내버려두고, 살 사람은 살리는 결론에 도달한다는 얘긴데 중간에 주인공이 쫓기는 과정에 카 체이스 시퀀스가 나온다. 어디까지나 단순한 양념에 불과한 부분이므로 그다지 공들인 흔적도 없거니와 별로 흥분되지도 않는 장면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카 체이스의 고전 격인 영화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기왕 카 체이스 장면을 집어넣으려면 의당 그래야 하지 않을까 하고. 바로 ‘불리트(Bullitt, 1968)’와 ‘프렌치 커넥션(French Connection, 1971)’이다.
영국의 촉망받던 감독 피터 예이츠가 미국에서 처음 만든 영화인 불리트는 ‘킹 오브 쿨(King of Cool)’로 불리던 스티브 맥퀸이 불리트라는 이름의 형사로 나온 범죄 드라마다. 하지만 영화 자체보다 영화에 10분 남짓 포함된 카 체이스 시퀀스로 당당히 영화사에 기록된다. 카 체이스는 그 전에도 영화에 등장했지만 최초의, 본격적인 의미의 카 체이스는 이 영화가 효시라는 게 대다수 영화사가들의 견해다. 이 영화를 기점으로 할리우드의 카 체이스 장면이 근본적, 혁명적으로 바뀌었다는 것.
이미 ‘대탈주(Great Escape, 1963)’에서 오토바이 묘기를 보여줬던 스피드광 맥퀸은 실제로 나름대로 정평 있는 스피드카 레이서로서 이 영화에서 자신의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덕분에 그가 운전한 포드 머스탱 GT는 다시 한번 명성을 드높이면서 ‘꿈의 자동차’로 등극했고, 이 차가 누빈 샌프란스시코의 오르락내리락하는 언덕길들은 새삼스레 관광 명소로 떠올랐다. 원래 샌프란스시코의 길들은 이미 히치콕의 ‘현기증(Vertigo, 1958)’을 통해 관광 명소가 되긴 했지만 불리트로 인해 또 다시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것. 불리트의 카 체이스 장면은 거의 50년이 지난 지금 봐도 흥분될 만큼 역동적이고 짜릿하다. 거기에는 당연히 편집 기술도 한몫 했는데 당연스럽게도 아카데미 편집상(프랭크 켈러)을 받았다.
이런 불리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게 ‘프렌치 커넥션(사진)’이다. 윌리엄 프리드킨이 연출해 아카데미 감독상, 작품상, 남우주연상(진 해크먼)을 휩쓴 이 영화가 카 체이스로도 유명한 건 우연이 아니다. 제작자 필립 댄토니는 불리트의 제작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역시 범죄수사물인 프렌치 커넥션은 그때까지 주로 조연 전문이던 진 해크먼이라는 걸출한 배우를 주연급으로 당당히 끌어올린 기폭제가 됐다. 하지만 해크먼이 맡은 ‘뽀빠이’ 형사역은 사실 처음에 폴 뉴먼이나 스티브 맥퀸에게 돌아갈 뻔 했다. 프리드킨은 주연으로 월등히 유명하고 인기 높은 뉴먼을 원했으나 출연료 때문에 좌절됐다. 뉴먼이 너무 많이 부른 것. 그런가 하면 맥퀸은 불리트와 유사한 카 체이스가 나오는 범죄물은 싫다며 고사해 결국 해크먼이라는 훌륭한 배우가 ‘탄생’한 것이다.
이 영화의 카 체이스가 불리트보다 더 나아갔다고 한 것은 그것이 다른 차량과 행인의 왕래가 빈번한 평일 낮의 뉴욕 거리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종래 카 체이스는 제한된 공간(외따로 떨어진 고속도로나 한산한 시골길), 아니면 특정한 시간(불리트처럼 차량과 행인이 뜸한 일요일 오전)에 일어나는 것으로 설정돼 있었으나 이 영화에서는 전철을 타고 도주하는 용의자를 쫓는 주인공의 자동차(GM 폰티액 르망)가 도심의 고가 철도 아래를 오가는 차량과 행인들 사이를 뚫고 질주한다. 그 박진감과 스릴감이라니. ‘영화사상 가장 훌륭한 카 체이스 장면’이라는 평이 실감날 정도다. 그래선지 이 영화도 불리트와 마찬가지로 아카데미 편집상을 받았다(제럴드 그린버그).
이 두 영화의 카 체이스가 지닌 가장 큰 장점은 요즘 유행하는 것처럼 컴퓨터 그래픽을 사용한 눈속임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 같은 컴퓨터기술이 없기도 했지만 출연배우와 스턴트맨들의 목숨을 건 투혼과 스태프들의 투철한 장인정신이 없었으면 만들어질 수 없는 장면들이었다. 그러나 이 두 영화가 카 체이스의 참맛을 보여주었다면 그로 인한 파괴의 쾌감을 보여준 영화는 따로 있다. ‘블루스 브라더스(Blues Brothers, 1980)’다.
미국 NBC TV의 장수 코미디 프로그램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의 한 코너를 오리지널로 당시 최고의 코미디언으로 각광받던 존 벨루시와 댄 애크로이드가 검은 슈트에 검은 모자, 검은 선글래스까지 온통 검은색으로 휘감고 말썽장이 형제로 나와 춤과 노래, 소동을 벌이는 이 코미디에는 무려 70여대의 자동차가 동원돼 카 체이스를 펼치다가 그중 60대가 부서진다. 속편인 ‘블루스 브라더스 2000(1998)’이 기록을 갱신하기까지 한편의 영화에서 파괴된 자동차 대수로는 최고기록이었다. 사정없이 부서져나가는 자동차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시원하면서도 아무리 돈 많은 미국의 영화라지만 저럴 수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카 체이스와는 상관없지만 ‘블루스 브라더스’ 얘기가 나온 김에 재미있는 사족 하나. 이 영화에는 레이 찰스, 제임스 브라운, 아리사 프랭클린 등 유명 인사들이 카메오로 다수 출연했다. 그중 영화 말미에 영화 속 관객들이 블루스 브라더스의 공연을 기다릴 때 시간을 때워주는 흑인 노인이 한사람 등장한다. 그가 바로 전설적인 재즈가수이자 밴드 리더인 캡 캘러웨이(Cab Calloway)다. 그가 영화에서 부르는 노래는 유명한 ‘미니 더 무처(Minnie the Moocher)’, 1931년에 발매돼 100만장 넘게 팔린 재즈곡이다. 이 노래는 보통 스캣이라 불리는 의미 없는 애드리브 읊조림으로 더욱 유명한데 캘러웨이가 한창 때 자신의 밴드와 함께 이 노래를 부르며 추는 춤을 보면(1932년에 찍은 동영상이 유튜브에 존재한다) 일세를 풍미한 마이클 잭슨의 춤이 어느 날 갑자기 허공에서 튀어나온 게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원형이 무엇이었는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김상온(프리랜서·영화라이터)
[김상온의 영화이야기] 40. '카 체이스'의 추억
입력 2015-10-13 1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