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영화제가 준 신선한 충격, ‘몸 값’·‘소통과 거짓말’[20회 BIFF]

입력 2015-10-11 00:01 수정 2015-10-11 10:36
영화 ‘몸 값’ 스틸컷.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영화 ‘소통과 거짓말’ 스틸컷.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 이 기사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돼 있습니다.

지난 1일부터 열렸던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부산영화제)의 마지막 밤이 저물었습니다. 개막일 휘몰아쳤던 비바람이 잦아든 후 부산의 하늘은 유독 맑고 깨끗하게 펼쳐졌죠. 이처럼 갖은 내홍과 쏟아지는 우려에도 세계 각국에서 초청된 304편의 영화들이 부산영화제에서 무사히 상영을 마쳤습니다.

국내외 영화계 인사들이 모습을 드러낸 자리에서는 그들과 대중의 소통이 한결 심도있게 이루어졌습니다. 또 유수의 영화제를 휩쓴 지아장커, 허우 샤오시엔, 레오 카락스 등 거장들의 신작을 미리 관람할 수 있던 프로그램도 볼거리였죠. 매년 눈부신 약진을 보여 주는 한국 작품들도 영화 팬들의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한국 단편 경쟁 부문에 출품된 영화들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예년보다 적은 10편의 영화가 출품됐지만 작품들의 내실은 지난 영화제 못지않았죠. 특히 이충현 감독의 ‘몸 값’은 단연 돋보이는 단편이었습니다.

단편 영화 ‘몸 값’

단편 영화의 매력은 ‘촌철살인’에 있습니다. 러닝타임이 30분 안쪽인지라 감독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압축적으로 구현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서 단편 영화의 미장센에는 ‘상징’들이 보다 조밀하게 채워져 있습니다. 대사도 은유적이고 암시적일 때가 적지 않죠.

그런데 ‘몸 값’은 조금 독특합니다. 상영 시간 14분의 대부분이 주인공 두 명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내용을 들여다봐도 단편 영화 특유의 시적 언어들은 없습니다. 오히려 생활 영역과 극단적으로 맞닿아 있는 언어들이 이 영화의 대사를 구성하고 있죠. 좁은 모텔방 안 두 남녀가 대화로만 관객을 빨아들이는 모습이 로만 폴란스키의 ‘대학살의 신’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이야기 역시 단순하고 직관적입니다. 처녀와의 하룻밤을 원하는 중년 남자(박형수 분)가 한 여고생(이주영 분)과 교외의 모텔방에서 만납니다. 담배를 피우고 있던 여고생을 본 남자는 “담배는 언제부터 피웠냐” “본드도 불고 그랬냐”며 넌지시 과거를 캐묻죠. 대화는 여고생 처녀 논쟁으로 번집니다. “너, 그런데 처음은 맞는 거지?”

처녀라면 피가 났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남자에게 여고생은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입니다.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께 성추행을 당해서 남자가 원하는 것처럼 피는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죠. 그러나 남자의 기준은 몹시 까다롭습니다. “그러면 주영아, 내가 너한테 100만원을 다 줄 수는 없을 것 같아.” 남자는 보통 원조교제 수준의 17만원으로 화대를 확 깎습니다. 처녀 논쟁은 어느새 ‘몸 값’ 흥정으로 바뀌었죠.

“처음이 맞다”며 황당해하는 여고생에게 남자는 “너, 고등학생은 맞는 거지?” “어디 고등학교 다니는데?”라며 집요하게 심문을 시작합니다. 여고생은 근처 고등학교에 다닌다고 답합니다. 그러자 남자는 소파에 길게 드러눕더니 “당했네, 당했어”라고 탄식을 내뱉습니다. 여고생의 교복에 떡하니 적혀 있는 다른 지역 학교 이름 때문이죠. 놀라 학교 마크를 쳐다보는 여고생에게 남자는 비아냥댑니다. “쳐다본다고 그 마크가 바뀔까?” 상냥하던 말투는 한 순간에 험악하게 바뀌었습니다. 욕을 하며 역정을 내는 남자에게 여자는 묻습니다. “아저씨, AB형이죠?”

“그러면 그냥 7만원에 해.” 100만원이던 화대는 어느새 7만원까지 떨어졌습니다. 남자가 샤워를 하러 간 사이 여고생의 ‘처음’을 노리는 또 다른 남자에게서 전화가 걸려 옵니다. 여고생은 전화를 받으며 방 밖으로 나가고, 카메라는 그를 가까이 따라 붙습니다. 여고생은 가발을 벗어 던지며 옥상으로 올라갑니다. 거기에는 ‘여고생’들이 가득하죠. 아직까지 큰 반전은 없습니다. 알고 보니 여고생은 매춘 집단의 일원이었구나, 이 정도죠.

담배를 문 여고생은 다른 방으로 이동하더니 ‘몸 값’ 흥정을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자신의 몸값이 아닌, 아까 그 남자의 몸값입니다. 순간 이 영화의 제목인 ‘몸 값’은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는 사실이 폭로됩니다. 관객들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사실들이 순식간에 밀려들지만 영화는 끝납니다. 그러니 충격도 클 수밖에요. 이 감독이 고등학교 시절 연출했다는 5편의 단편도 무척 궁금해지네요.

감독의 능력만큼 배우들의 연기도 출중했습니다. 박형수는 찌질하게 여고생과 처녀 논쟁을 벌이고 화대를 깎는 중년 남자를 능숙하게 소화했습니다. 대사 전체가 애드리브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역할 몰입도가 높았죠. 이주영의 여고생 연기 역시 예사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대사를 분명하게 또박또박 뱉었다면 되레 작위적인 느낌이 강했을 텐데요. 처음 만나 몸을 섞게 될 남자와의 사이에 조성된 어색한 분위기가 이주영의 대사 처리 덕에 살아났죠. 또 남자의 호통에도 이 모든 상황이 자신의 계획대로라는 듯이 피식피식 웃어 넘기는 연기는 압권이었습니다.

장편 영화 ‘소통과 거짓말’

뉴 커런츠 섹션에서 소개된 장편으로는 이승원 감독의 ‘소통과 거짓말’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4:3 화면을 가득 흑백의 세상에는 소통을 갈구하는 남녀의 해괴한 몸짓들이 가득합니다. 극 중 인물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관객과의 대화 도중에도 “변태 같다” “쇼킹했다” “불편했다”는 반응이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외려 이 같은 충격적 연출이 영화의 주제의식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데는 적격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가끔, 혹은 자주 느낄 법한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소외감이 극 중 인물의 극단적 행동으로 은유됐기 때문이죠.

영화는 8분간의 롱테이크로 시작합니다. 학원 원장인 여자(김선영 분)와 그 곳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여자(장선 분)의 대화인데요. 원장은 여자에게 회식 때마다 학원 남자 선생님과 잠자리를 하고 사진까지 찍었다는 것이 사실이냐고 다그칩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여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독이 오른 원장의 표정만이 화면 위로 흐를 때부터 답답함이 느껴집니다. 여자가 “무슨 상관이냐”며 원장에 맞서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두 사람이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며 나누는 비언어적 표현들이 물리적으로도 반만 전달되는 탓입니다. 반쪽짜리 소통이 주는 답답함이죠.

또 다른 주인공인 남자 학원 강사(김권후 분)의 이야기를 봅시다. 그는 다산콜센터에 전화를 걸어 옆집 개가 매일 자기를 쳐다본다고 이를 해결해달라고 호소합니다. 남자의 황당한 요구에 전화 너머 콜센터 직원의 언성이 높아집니다. 또 다시 숨통이 꽉 막히는 기분이 듭니다. 이해할 수 없는 남자의 행동에 더해서 전화라는 매체로 소통을 할 때의 한계까지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본보에도 고충처리인에게 전화를 걸어 개인적 고충을 털어 놓았던 독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웃으며 볼 수만은 없더군요.

남자(김권후 분)와 여자(장선 분)도 대화를 합니다. 내용은 거짓투성이고, 흐름은 비현실적입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 덩어리는 서로 섞이지 않지만 교환은 됩니다. 원장이나 콜센터 직원과 대화를 할 때와는 다르게 평온하죠. 그러다가 남자와 여자는 기괴한 형태의 섹스를 합니다. ‘소통과 거짓말’을 보는 관객들은 “이들이 왜 이런 행동을 할까?”라고 질문을 계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스크린 속 인물들은 답이 없죠. 그래서 관객들의 물음은 호수에 던진 돌처럼 작은 파장을 일으킨 채 자신 안으로 가라앉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의미를 읽기 힘든 대화와 몸짓은 끝내 서로를 연결하지 못하고 슬픔을 남깁니다. 이 같은 행동의 중첩을 통해 소통의 부재라는 주제의식이 폭발하는 역설적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감독의 기민함이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또 영화의 배경이 천연색으로 빛났다면 슬픔과 소외감 같은 감정들이 와 닿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4:3 비율 역시 극 중 인물들의 좁은 세상을 기술적으로 잘 묘사한 장치였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초반 8분의 롱테이크에서 실감나는 짜증 연기를 선보인 김선영 배우가 매우 인상 깊었네요.

‘소통과 거짓말’은 부산영화제에서도 호평을 받았습니다. 영화가 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을 수상한 데 이어 여자 주인공 장선이 올해의 배우상을 가져갔죠. 소통하지 못하는 이들의 이야기로 소통의 장을 만든 이 영화가 더 많은 관객과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라효진 기자 surplu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