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항 논설위원의 ‘그 숲길 가보니’] 천년 주목이 사는 ‘밝은 산’의 힐링을 위해

입력 2015-09-30 14:26 수정 2015-10-01 09:40

[사진설명](위에서부터 순서대로)
- 강원도 태백시 태백산 정상의 주목 고사목 / 태백산 천왕단에서 조망한 초가을 단풍 / 태백산 유일사 앞 주목 보호수 / 주목 치수(穉樹·어린 나무) / 장군봉에서 조망한 매봉산 풍력발전단지 / 강원도 정선군 만항마을 주민들이 내건 ‘국립공원 내 공원자연마을지구’ 지정 촉구 현수막 / 태백산 단종비각 / 단종비각 제단에 놓인 머루포도 / 붉게 번져가는 단풍 / 태백산과 함백산의 야생화. 순서대로 투구꽃, 쑥부쟁이, 진범 / 강원도 정선군 함백산 정상의 주목 고사목과 단풍 / 태백·정선=구성찬 기자



가을은 자연에게 뺄셈과 외로움의 계절이다. 농부는 오곡백과를 거두지만, 숲은 열매와 잎을 버림으로써 여름 내내 축적한 에너지를 스스로 감축한다. 숲과 나무들은 다가올 긴 겨울에 대비해 성장과 광합성을 멈추고, 필수에너지를 비축하는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한편 자손을 퍼뜨리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정성껏 키워 온 열매들과도 차례차례 이별을 한다. 배고픈 새들을 유혹하려고 가을부터 겨울까지 시차를 두고 붉고 검은 열매를 맺는 여러 나무들, 그리고 불어오는 바람의 끝을 잡고 필사적으로 먼 곳까지 비대칭 프로펠러 모양의 씨앗을 뿌리는 단풍나무.

◇ 힐링이 필요한 설화와 수원지의 땅
가을 기운이 완연해진 지난 21일과 22일 보통 겨울에 많이 찾는 태백산과 함백산으로 향했다. 주능선이 백두대간의 허리에 해당하는 두 산은 해발고도가 각각 1567m와 1573m로 높은 산이지만, 비교적 높은 곳까지 도로가 나 있는데다 주능선 탐방로가 평탄한 육산이다. 그래서 백두대간꾼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겨울철에는 눈을 뒤집어쓴 주목군락이 웅장하고, 봄부터 가을까지 다양한 야생화가 탐방객을 반긴다. 태백산에는 건국신화와 역사유적이 깃들어 있고, 이웃하는 대덕산과 태백시는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지, 검룡소와 황지연못을 각각 품고 있다.
22일 오전 태백산 유일사 매표소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태백산 역시 긴 세월 산림자원이 무분별하게 벌채되고, 그 자리에 일본잎갈나무 위주의 인공조림이 이뤄졌다. 그런데도 조림지가 아닌 곳의 수종은 다양하고 노거수도 많다. 호랑버들, 거제수, 층층나무, 느릅나무, 산뽕나무, 물박달나무, 산돌배나무 등이 보인다. 등산로 초입이라도 해발고도가 1000m 넘는 곳이라 당단풍, 고로쇠나무, 복자기나무 등에 드문드문 단풍이 들었다.
이날 산행은 국립공원관리공단의 나공주 미래전략실장과 함께 했다. 환경부와 국립공원관리공단은 태백산 일대를 22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려 하고 있지만, 최근에는 지역주민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다. 나 실장은 현재 도립공원인 태백산의 국립공원 승격을 위한 여론수렴작업을 맡고 있다. 최문순 강원지사는 지난 4월초 환경부를 방문해 국립공원으로 지정해달라고 건의했다. 건의안에 따르면 태백산 국립공원은 태백시와 정선군에 걸친 99.7㎢ 규모로 태백산(49.3㎢), 함백산(41.3㎢), 대덕산·금대봉 생태경관보호지역(9.1㎢)을 포함한다. 나 실장은 말했다. “태백시민, 정선군민들은 함백산의 석탄산업, 태백시의 리조트 산업 등으로 비교적 단시간 안에 영고성쇠를 겪고 난 뒤 지쳐 보인다. 자연도 마찬가지다. 사람도, 자연도 힐링이 필요하고, 그 좋은 방법이 국립공원 지정이다.”

◇ 야생화에 순하게 겹쳐진 이 순간
다양한 가을 야생화도 탐방로 주변에서 볼 수 있다. 까실쑥부쟁이, 투구꽃, 노랑물봉선, 산부추, 진범, 구릿대, 미역취 등등. 가을철이라 구절초, 벌개미취, 쑥부쟁이, 고들빼기 등 국화과 꽃들이 많은데 구별이 쉽지 않다. 일단 구절초는 꽃이 대부분 흰색이고, 쑥부쟁이나 벌개미취와 달리 잎이 쑥처럼 갈라져 있어서 구별하기가 쉽다. 벌개미취와 쑥부쟁이는 꽃만 보고는 구분하기 어려워 잎을 봐야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 일단 벌개미취는 들판에서만 자란다. 벌개미취는 잎이 길고 잎 가장자리에 잔톱니가 있지만, 쑥부쟁이는 작은 잎에 굵은 톱니를 갖고 있다. 쑥부쟁이와 개쑥부쟁이도 구별하기 어렵다. 일단 쑥부쟁이 잎의 톱니가 개쑥부쟁이 잎의 톱니보다 훨씬 더 뚜렷하다. 더 쉽게는 산과 들의 마른 땅에서 발견되면 개쑥부쟁이, 논둑이나 습지 주변에서 발견되면 쑥부쟁이일 확률이 높다.
우리는 그냥 들국화라고 부르지만, 들국화라는 종은 없다. 그러나 들국화라는 통칭으로 불러도 가을의 정취를 감상하기에 지장은 없다. 어린이 같은 감성과 혁명가 같은 기질을 지녔던 시인 천상병도 그랬나 보다. ‘산등성 외따른 데,/ 애기 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뉘인다.// 가을은/ 다시 올 테지.// 다시 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쳐진 이 순간이… (‘들국화’ 전문, 시집 ‘주막에서’) 많은 것을 비울 줄 아는 가을산은 외로운 사람과 교감한다.

◇ 살아서 천 년, 죽어서도 천 년 가는 나무
유일사에 닿기 직전에 주목 보호수 앞에 도달했다. 키가 15m, 가슴높이 나무직경이 1m를 넘는 주목은 초가을답게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찌르듯이 솟아있다. 여기부터 산림청이 지정한 산림유전자원보호림이다. 해발 1260m인 유일사 쉼터부터 정상인 장군봉까지 1.7㎞ 탐방로 주변에는 주목과 그 고사목, 분비나무, 잣나무가 많다. 낙엽수로는 철쭉, 회나무, 함박꽃나무(산목련)가 많다. 회나무의 네갈레 열매껍질이 열리면서 씨앗들이 보인다. 마가목의 붉은 열매들도 높은 가지 끝에 주렁주렁 매달렸다.
백두대간의 고지대를 따라 군락을 이루는 주목은 완만한 능선을 지닌 태백산이나 소백산의 경관에 특히 잘 어울린다. 강원도 정선의 두위봉에는 수령 1000년이 넘는 주목들이 있을 만큼 장수하는 나무다. 목재는 향기가 좋고 단단해 가구, 조각상, 바둑판 등으로 이용가치가 높다. 그래서 주목을 가리켜 ‘살아서 천 년, 죽어서도 천 년’이라는 찬사를 곧잘 보낸다. 태백산도립공원에 따르면 태백산의 주목은 총 2805주이며, 우리나라 주목 서식지중 가장 대단위 군락지를 형성하고 있다. 그 중 높이 11m이상 되는 것은 49 그루이며 지름 1m 이상 되는 나무는 15그루다. 그리고 지름이 가장 큰 나무는 1.44m로서 수령은 500년 이상이다.

◇ 밝은 민족이 사랑한 밝은 산
정상인 장군봉에서는 가까운 함백산, 고랭지 채소밭과 풍력발전단지가 유명한 매봉산, 멀리 두타산까지 보인다. 가시거리가 긴 맑은 가을날이 사람의 눈에게 주는 선물이다. 장군봉 주변에는 한민족의 시조인 단군에게 제를 올렸다는 천제단(天祭壇) 3곳이 있다. 장군봉 위의 장군단, 영봉위의 타원형 제단인 천왕단, 그리고 영봉 남쪽에 하단이 그것들이다. 이들은 각각 사람, 하늘, 그리고 땅을 의미한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태양을 숭배하는 ‘밝은 민족’으로, 하늘에 제사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 제를 올리는 산은 ‘밝은 산(白山)’이라고 했다. 백두산, 장백산, 태백산, 함백산, 소백산, 백운산, 백마산 등 우리나라에 ‘백’자가 들어가는 산이 많은 까닭이다.
삼국유사 ‘기이’편에는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대략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유화라는 여자가 하늘의 아들 해모수의 꼬임에 넘어가 그와 정을 통하자 집에서 쫓겨나 귀양을 간 곳이 바로 태백산 남쪽 우발수다. 그곳에서 유화를 만난 금와가 그녀를 방에 가두니 햇빛이 계속 따라와 비추었다. 유화는 그로부터 태기가 있어 알 하나를 낳았고, 거기에서 한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오니 그가 훗날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이었다.’ 이런 신화는 어차피 쉽게 믿을 수 없지만, 태백산이 민족정기를 품고 있는 산이라는 인식만큼은 일관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신경준이 편찬한 ‘산수고’의 산경분류체계에서 12산은 삼각산(북한산), 백두산, 원산, 낭림산, 두류산, 분수령, 금강산, 오대산, 태백산, 속리산, 육십치(육십령), 지리산이다. 삼각산을 제외하고는 백두대간과 정확히 일치한다. 조선시대 실학파 지리학자 이중환의 ‘동국산수록’에서 꼽은 12개 명산에도 태백산은 빠지지 않는다.
천왕단에서 문수봉, 당골 쪽으로 보는 첫 단풍이 장관이다. 주로 시닥나무와 철쭉 등의 단풍이다. 검푸른 분비나무와 주목 사이로 마치 피를 흩뿌려 놓은 것 같다.

◇ 풍요로운 산을 외롭지 않게 하는 길
만경사로 내려가는 길목에는 단종비각이 자리잡고 있다. 비각이 세워진 사연은 이렇다. 조선 제 6대 임금인 단종이 영월에 유배됐을 때 고을의 추익한 전 한성부윤이 태백산의 머루와 다래를 따서 단종에게 진상했다고 한다. 어느 날 추익한이 꿈에서 진상차 영월로 가던 도중 곤룡포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태백산으로 오는 단종을 만났다. 추익한은 이를 이상히 여기며 영월 땅에 도착해 보니 단종이 그날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단종은 1457년 영월에서 숨진 후 태백산 산신령이 됐다고 마을 주민들은 믿었다. 오늘도 비각 앞 제단에는 잘 익은 포도 한 송이가 올려져 있다.
태백산국립공원 지정계획 지역에는 산양, 기생꽃, 대성쓴풀, 복주머니란(개불알꽃) 등 멸종위기종 26종을 비롯한 2837종의 야생생물이 서식한다. 국립공원 지정과 함께 보호수준이 높아지면 만항재~함백산정상~두문동재~금대봉~분주령~대덕산~검룡소로 이어지는 탐방로와 주변 생태계가 더 안전하고 풍요로워질 것이다. 태백산도립공원, 함백산, 대덕산·금대봉 생태·경관보호지역이 서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태백산이 결국 국립공원이 될 것인지, 되더라도 계획면적보다 얼마나 줄어들 것인지 알 수 없다. 처음에는 영월·정선군에서 반대했지만, 최근에는 태백시 안에서도 반대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지자체간의 이해관계, 계획면적의 대부분인 국·공유림을 관할하는 산림청과 환경부의 갈등 등 걸림돌이 많다. 이 가을 높고 맑은 하늘아래 함백산, 금대봉, 대덕산과 어깨동무를 하고픈 태백산은 유난히 외로워 보인다.
태백·정선=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 사진=구성찬 기자 ichthu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