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온의 영화이야기] 38. 패러디영화의 종언?

입력 2015-09-22 10:48

리암 니슨 주연의 액션영화 ‘테이큰’을 패러디한 ‘투큰(tooken: taken의 의도적인 문법적 오류)’이란 코미디를 봤다. 지나치게 말초적인 웃음 유발에만 신경 쓴 나머지 저질스런 섹스 관련 우스개로 점철돼있었다. 존 애셔라는 감독이 만든 이 영화를 보면서 자꾸 멜 브룩스가 그리워졌다. 아니 하다못해 ‘ZAZ'라도.

패러디영화의 역사는 오래다. 1903년 영화 초창기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최초의 서부극 ‘대열차강도(The Great Train Robbery)'가 나온 지 불과 2년만인 1905년 이를 패러디한 ’소열차강도(The Little Train Robbery)'가 만들어졌으니까. 이후 찰리 채플린이 ‘독재자(The Great Dictator, 1940)'를 통해 현실의 독재자 히틀러를 패러디 또는 풍자하고, 유명한 코미디 콤비 애보트와 코스텔로가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프랑켄슈타인‘ 등 기존 문학작품 및 대중예술 주인공들을 비튼 패러디에 여러 편 출연하면서 패러디영화의 맥을 이어왔다. 그러다 1960년대 말 멜 브룩스라는 걸출한 패러디영화의 명인이 나타났다.

브룩스는 영화감독, 배우, 제작자, 극작가, 코미디언, 작곡가 등으로 활약한 만능연예인으로서 가히 ‘패러디의 제왕’이라고 불릴만한 인물이다. 1960년대에 제임스 본드를 우스꽝스럽게 패러디해 크게 인기를 끈 TV 코미디 시리즈 ‘달려라 스마트(국내 방영시 제목, 원제는 Get Smart다. 2008년 극장용 영화로 리메이크 됐다)’를 만들면서 패러디영화 제작 연출에 뛰어들었다. 그 뒤 ‘프로듀서들(1968)’ ‘불타는 안장(Blazing Saddles, 1974)' ‘청년 프랑켄슈타인(Young Frankenstein 1974)’ ‘무성영화(Silent Movie 1976)’, 히치콕의 ’현기증’을 패러디한 ‘고소공포증(High Anxiety 1977)’을 거쳐 ‘스타워즈’의 패러디물인 ‘스페이스볼스(Spaceballs 1987)’ ‘못말리는 로빈훗(Robin Hood: Men in Tights 1993)’ ‘양들(lambs)의 침묵’을 비튼 ‘햄들의 침묵(The Silence of the Hams(1994)’ ‘못말리는 드라큘라(Dracula: Dead and Loving It 1995)’등 80~90년대는 물론 현재까지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가 얼마나 다재다능한지는 그가 아카데미상, 에미상, 토니상은 물론 그래미상까지 휩쓸었다는데서 잘 드러난다. 알다시피 에미상은 ‘TV계의 오스카’ 토니상은 ‘뮤지컬을 포함한 연극계의 오스카’ 그래미상은 ‘음악계의 오스카’라 불리는 권위 있는 상들이다. 뿐인가. ‘청년 프랑켄슈타인’은 SF계의 노벨상이라 할 휴고상과 네뷸러상까지 받았다. 그는 이러한 성취를 바탕으로 70년대에는 가장 흥행성적 높은 10대 감독에 포함됐고, 2013년에는 마침내 영화인 최고의 영예랄 수 있는 미국영화연구소(AFI)의 ‘평생업적상’을 수상했다.

브룩스의 패러디영화들은 걸작이 많다. 실수투성이 코믹 스파이의 원조 겸 대표선수인 ‘스마트’는 당초 TV시리즈니까 제외하자. 브로드웨이의 이면을 풍자한 ‘프로듀서들’부터 시작해 최초로 흑인 카우보이를 주연으로 내세워 기존 서부극들을 신랄하게 패러디한 ‘불타는 안장’과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을 포함해 고전 공포영화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비튼 ‘청년 프랑켄슈타인’은 그중에서도 백미여서 AFI가 선정한 미국 100대 코미디영화 가운데 각각 11, 6, 13위에 올랐다. 그의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웃음 속에서도 어딘지 가슴이 짠해지는 채플린식 페이소스가 느껴진다. 물론 채플린보다는 좀 더 ‘현대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만큼 영화에 ‘품위’가 있다는 얘기다. 기존 유명 영화들을 때로는 잔인할 만큼 물어뜯고 비틀어댄 패러디임에도.

브룩스 이후 나온 패러디영화의 명가(名家)가 ‘ZAZ 사단’이다. 데이비드 주커와 제리 주커 형제, 그리고 짐 에이브럼스 세명이 모인 코미디영화제작집단. 1980년의 ‘에어플레인’을 시작으로 80년대와 90년대에 국내제목 ‘못말리는~’ (참고: 국내에서 ‘못 말리는 OOO’이라는 제목의 영화들이 히트하자 나중에 수입된 멜 브룩스의 영화들까지 일부가 이런 식으로 작명돼 상영됐다. 따라서 이런 제목의 영화들은 원제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으로 시작되는 일련의 패러디영화들과 진지한 정극배우였던 레슬리 닐슨을 ‘핑크 팬더’의 전설적 덜렁이, 영화 사상 최악의 형사 ‘클루조 경위(피터 셀러즈분)’에 버금가는 프랭크 드레빈 경사로 재탄생시켜 ‘미국판 구봉서’로 만든 ‘총알 탄 사나이(Naked Gun)' 시리즈 등으로 유명한 영화감독 겸 제작자 집단이 이들이다. 이들의 영화가 브룩스와 다른 점은 이들의 주안점이 ’그저 웃고 즐기자‘는데 있다는 것. 페이소스라든가 의미, 상징 따위는 관심 밖이다. 기존 영화의 유명한 장면들을 따 와서 별다른 변용도 없이 베껴 써 먹는 게 장기다. 그래도 확실한 것은 있다. ‘재미’ 하나는 분명하다.

그러나 패러디영화는 이들로써 끝난 게 아닌가 싶다. ZAZ 이후에도 재능 있는 흑인 배우가문인 ‘웨이언스’형제들이 힘을 합쳐 공포 또는 슬래셔 무비를 비롯해 이런 저런 히트작들을 짜깁기한 ‘무서운 영화’ 시리즈(특기할 것은 나중 일부는 웨이언스 형제가 손을 떼고 데이비드 주커가 만들기도 했다)가 나왔고 이외에도 몇몇 사람들이 ‘데이트 무비(Date Movie 2006)' ‘에픽 무비(Epic Movie 2007)’ ‘재난 영화(Disaster Movie 2008)'등을 만들어 내놨으나 수준 이하였다. 마치 패러디영화가 종언을 고한 듯하다.

거기다 패러디영화는 본질적으로 기존 영화를 ‘베껴먹는 것’인 만큼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폄훼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패러디영화는 나름대로 확고한 팬층이 형성돼있을 뿐 아니라(그만큼 흥행이 보장된다는 얘기다) 꼭 그런 이유만이 아니더라도 기존 아이디어를 비트는 발상의 전환이라든지 참신한 시각을 통해 재미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존재의의가 있다. 멜 브룩스의 작품 같은 멋진 패러디 영화들이 더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김상온(프리랜서·영화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