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증오살인’ 왜?…전체에 대한 증오가 약자 향한 보복으로 나타나

입력 2015-09-18 17:50

지난 9일 충남 아산의 한 대형마트에서 주모(35·여)씨를 납치해 살해한 뒤 시신을 불태운 김일곤(48)은 전형적 ‘사회증오형’ 범죄자다.

척수장애 6급인 그는 배달원, 자동차 부품공장 근로자, 일용직 등을 전전했다. 임금 체불을 당하고 미수금 등을 받지 못해 사회에 대한 증오가 쌓였던 것으로 보인다.

김일곤은 자신을 무시하거나 불친철했다고 느끼게 만든 사람들, 미수금을 주지 않은 이들, 자신을 조사했던 경찰 등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힌 쪽지를 지니고 다녔다. 복수심에 불타던 그는 불특정 다수의 약자를 상대로 이를 해소하려고 했다.

사회증오형 범죄는 갈수록 늘고 있다. 지난 4월 경남 진주에서 발생한 중국동포를 대상한 ‘묻지마 흉기 살인사건’이나 지난 5월의 ‘예비군 훈련장 총기 난사 사건’처럼 사회에 대한 분노를 제3자에게 폭발시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치열한 경쟁에서 탈락하고 고립된 약자, 낙오자를 끌어안을 완충장치가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사회 전체 분위기가 이들을 소외시키고 배제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스물여덟 개의 이름=17일 경찰에 검거된 김일곤은 독일제 쌍둥이칼 두 자루와 커터칼, 그리고 자신에게 피해를 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적은 쪽지를 갖고 있었다. 경찰에 따르면 가로 15㎝, 세로 20㎝ 크기의 쪽지 2장에는 28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치료했던 의사와 간호사, 물리치료사, 돈을 갚지 않은 식당 여 사장, 자신을 조사했던 형사나 당시 참고인 조사를 받았던 사람, 재판장 등이 그들이다.

경찰이 캐묻자 그는 혼잣말로 “이것들을 다 죽여야 하는데”라고 중얼거리기도 했다고 한다. 또 “간호사는 나에게 불친절하게 대했고, 의사는 아픈데 나를 강제로 퇴원시켰다. 식당 사장은 미수금을 갚지 않아서, 판사는 1998년 절도사건 때 나에게 징역 5년을 때려서”라고 장황하게 이유를 댔다.

전문가들은 이 쪽지에 주목한다. 그가 전형적인 사회증오형 범죄자라는 걸 증명하는 증거물이라고 본다.

김상균 백석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쪽지를 만들었다는 것은 언젠가는 보복하겠다는 심리가 존재한다고 봐야 한다”며 “경찰서에 들어가면서 ‘나는 꼭 살아야 한다’고 외쳤던 것도 살고 싶다는 의지이기보다 보복을 해야 한다는 내면적인 증오를 표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주씨를 살해한 것뿐만 아니라 시체를 무자비하게 훼손한 것도 여성 혹은 사회에 대한 증오가 표출된 하나의 행위라고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회 빈곤층이나 소외된 사람들이 전체에 대한 원망을 여성 등 약자에게 푸는 전형적인 형태”라며 “주변인들과 교류도 없이 사회로부터 고립돼 있던 상태에서 이같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고집 세고 집착증…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았다”=김일곤은 지난해 5월부터 약 1년간 성동구 용답동의 한 노숙인 쉼터에서 지냈다. 18일 만난 쉼터 관계자는 “고집이 세고 집착증과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듯했지만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었다”면서 “자신을 전과 7범이라고 소개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다”고 전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상담을 할 때에 임금 체불 얘기를 많이 했다. 사회에 대한 불만이 어느 정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일곤은 이 곳에서 지내며 배달 일을 하고 자동차 부품 공장에 다녔다. 함께 쉼터에 묵었던 130여명 중에 정을 나눴던 사람은 없었다.

그는 지난 8월부터 성동구의 한 고시원에 짐을 풀었다. 한 사람이 겨우 몸을 누일 수 있는 1평 남짓한 방에 월세 14만원을 주고 지냈다. 30여명의 고시원 거주자들과도 말 한 번 섞지 않았다고 한다.

경찰은 고강도 조사를 벌이고 있지만 김일곤이 불리한 진술은 거부하거나 번복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가 동물병원에서 개 안락사약을 사려 했던 이유, 시신 훼손 이유과 과정 등은 여전히 베일에 쌓여있다.

한편 경찰은 이번 검거작전에 공을 세운 성동경찰서 성동지구대 김성규(57) 경위와 주재진(40) 경사를 각각 한 계급 특진 임용하고, 성동지구대 임채원(52) 경위 등 경찰관 6명에게 경찰청장 표창을 했다. 검거 시 김씨의 흉기를 빼앗는 등 도움을 준 방모(50)씨 등 시민 2명에게는 ‘용감한 시민장’과 보상금을 수여할 예정이다.

김미나 김판 기자 min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