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비평집 ‘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의 저자 이상헌(사진) 국제노동기구(ILO) 사무차장 정책특보가 지난 16일 저녁 서울시 홍대역 인근 '미디어카페 후'에서 독자들과 만났다. 노동경제학자로 2000년부터 ILO에서 근무해온 그는 칼럼, 페이스북, 책 등을 통해 한국 경제와 노동 현실에 대해 활발하게 발언하고 있다. 한국에서 대중강연은 처음이다.
#시민으로서의 노동자, 노동자로서의 시민
2시간가량 진행된 이날 강연에서 이 박사는 “노동자를 시민의 한 사람으로 대우하는 방식을 만들어 가는 게 중요하다”며 ‘노동자로서의 시민’ ‘시민으로서의 노동자’를 강조했다.
“최저임금 인상이 중요하죠.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게 노동자를 시민의 한 사람으로 대우하는 방식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봅니다. 노동자로서의 시민, 시민으로서의 노동자라는 인식이 절실합니다.”
그는 수 년 전 한국에 왔을 때 한 대형 유통매장에서 직원들이 전부 서서 일 하는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야말로 충격적이었어요. 제가 사는 동네(스위스 제네바)에선 상상도 못 할 일입니다. 외국에서도 서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럴 경우엔 로테이션이 굉장히 빨라요. 30분, 이 정도로. 신문기사를 보니까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의자 안 놓는다고 하고, 앉아서 일하면 고객들이 기분 나쁘게 생각한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그러나 6시간을 서서 일하는데 의자를 안 준다는 건 말도 안 돼요. 노동자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의자를 제공하는 게 원칙이죠.”
노동자를 종업원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 한 사람의 시민으로 보는 인식의 전환이 시급하다는 주장은 그의 책 ‘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는 책에서 국적 항공기 승무원들이 무릎 끓고 서비스하는 모습을 지적하고, 강남 아파트에서 우유 배달원에게 승강기 사용을 못하도록 한 사건을 질타한다.
#청년들 협박하고 있어
청년 실업문제에 대한 얘기도 나왔다.
“그리스나 스페인, 포르투갈의 청년들 상황은 훨씬 더 나빠요. 실업률만 보면 한국은 나쁘지 않은 편입니다. 그런데 거기 청년들을 만나보면 그렇게 비관적이지 않아요. 생각보다 매우 활발해요. 한국은 사정이 더 나은데도 청년들이 하나같이 처져있고 비관적인 거 같아요. 그 차이가 뭔지 저도 궁금합니다. 그들이 왜 더 행복해 보일까?”
이 박사가 찾아낸 답은 뜻밖에도 ‘협박’이다.
“그 쪽도 청년들을 위해 뭐 대단한 정책을 펴진 않고 있어요. 그런데 청년들을 협박하진 않아요. 한국은 청년들을 협박하고 위협하는 상황이에요. 지방 가서 일해라, 중소기업 가서 일해라, 외국 나가라, 이러잖아요. 그래서 청년들이 더 두려워하고 자심감도 없고 불안해하는 듯 합니다.”
그는 “청년을 걱정한다면 청년 정책을 하면 되는데, 실제 정책들을 보면 청년 정책은 발견하기 어렵다”면서 “청년들에 대한 압력을 높이면서 실제론 아무 것도 해주는 건 없는 이율배반을 해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좌파 열풍’, 우리에겐 조직이 있는가
코빈이 영국 노동당 당수로 선출되고, 샌더스가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로 떠오르는 ‘좌파 열풍’에 대해서는 “이런 열풍에 역사적 맥락은 있는 것 같다”는 의견을 내보였다.
“세계 금융위기 이후 불평등 문제에 대해 많은 이들이 공감하게 됐고, 지난 7∼8년간 대안적인 정책을 찾고 대안 세력을 찾아왔는데 계속 실패했어요. 그 반작용으로 60년대, 70년대 했던 정책들을 다시 발견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는 이어 “2차대전 이후에도 노조, 시민단체 등 시민들이 힘을 모아 정치를 바꿨다. 지금 우리에게 그런 힘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코빈이나 샌더스 열풍에서 중요한 것은 지난 수십 년간 이들을 지지해온 노동자 시민들의 조직이 있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드디어 히피들이 부활하는구나, 처음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들에게선 1960년대 히피 정서가 물씬 풍겨나요. 60년대 히피들이나 했던 얘기를 노동당 당수가 되겠다고 하는 사람이 계속 말한다는 건 놀라운 일이죠.”
그와 비교하면 한국 사회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는 게 그의 탄식이다.
“우리 사회가 두려움의 노예가 되는 게 아니냐, 두려움이 도처에 퍼져 있는 게 아니냐, 그런 생각이 들어요. 두려움이 내재화된 상황이라고 할까요. 모든 사안에 시비를 걸고 기필코 중립적이 되려고 하는데, 그 근저에는 축적된 두려움이 있어요. 그런 데서 놓여나면 좋겠어요.”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이상헌 ILO 사무차장 정책특보 "노동자를 시민의 한 사람으로 대우해야"
입력 2015-09-17 19:05 수정 2015-09-18 1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