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의 소설] 사십사

입력 2015-09-17 15:55

사십사/백가흠/문학과지성사

마흔의 문턱에 올라선 작가 백가흠(41)이 쓴 우울하고 한심한 자기세대에 관한 보고서 같다. 등단 15년 차다. ‘조 대리의 트렁크’(2007) 이후 8년 만에 낸 4번째 소설집에서 그가 스케치한 자신의 세대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아랫배는 조금 불룩해지고, 걸음은 느려지고, 정수리는 휑해지는’ 등 외모에서 중년 티가 나기 시작한다. 속을 들여다보면 ‘어쩌다 어른’이 되었을 뿐이다. 그들은 선배 세대처럼 민주화나 사회정의 따위를 부르짖지 않고 지극히 개인적 성공을 추구하지만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혼자가 됐다.

수록된 9편의 단편에서 40대 남자 주인공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추출되는 것은 ‘책임 회피’이다. ‘무슨 일이든지 책임이 자기에게 밀려오는 것을 못 견뎌 하며’, 우물쭈물하다 결국 개에게나 화풀이하는 ‘어른 찌질이들’이다.

‘흰 개와 함께하는 아침’의 주인공인 ‘나’는 살기 위해 버리는 법을 일찍이 터득한 생존형 인간이다. 오십에 교수가 됐다. 법적으로 총각이라 괜찮은 곳에서 선이 들어오고, 나는 10년째 동거 중인 스무 살 연하 수옥과 헤어지고 싶다. 노총각 시간강사의 자취집에 쳐들어온 건 제자 수옥이었다. 수옥은 한 집에 기거하던 착한 ‘현수’를 몰아낼 정도로 되바라진 여자였고 끝내 그가 떨쳐내지 못한 인생의 짐이다. 마지막까지 내가 한 일이라곤 수옥이 애지중지한 개를 버리는 것이었다. 수옥은 개 대신 고양이를 사온다.

‘더 송’의 주인공도 교수다. 지금은 성추행 교수가 돼 학교로부터 사직권고를 받고 있는 처지다. 아내는 집을 나갔고 유학 간 자녀들도 귀찮아한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지도교수의 부고 소식은 대학시절의 유쾌하지 않은 기억을 소환한다. 그때 그는 두 살 많은 사학과 착한 누나 해랑의 자취집에 얹혀살았다. 해랑의 선함을 이용한 건 운동권 누나 미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미현이 데려다놓고 한번도 돌보지 않은 개를 버리는 것으로 분풀이를 했을 뿐이다. 약자에 기생하는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니 적반하장이었지만, 그는 지금도 인정하고 싶지 않다.

거창한 사회 정의는 아니더라도 개인적 책임은 성숙한 어른이 져야할 삶의 무게다. 그걸 회피했을 때 수렁은 반복된다. 예컨대, ‘한 박자 쉬고’에서 예비 문학인인 ‘나’는 어느 날 카페에서 고교 때 자신을 수족처럼 부리던 ‘일진’ 균수를 만난다. 균수는 뱀처럼 ‘스으’ 하면서 한 마디만 해도 모든 걸 해결할 줄 알았다. 세월이 흘러 우연히 마주친 균수 앞에서 여전히 옴짝달싹 못하는 이 악몽의 되풀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표제작 ‘사십사’에서 여주인공이 원치 않는 관계에 대해 ‘노’라고 분명히 말하는 모습은 그래서 이 책이 제시하는 희망인지 모르겠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