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프와 큐브로 그려낸 삶의 풍경과 추억 류하완작가 영등포롯데갤러리 ‘플래시백’ 개인전 9월 17일부터

입력 2015-09-17 11:13
여성 작가의 길은 험난하고 고되다. 가족이 있든지 없든지 한국미술계에서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묵묵히 붓질하고 전시를 여는 까닭은 주어진 숙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서양화가 류하완 작가도 그렇다. 자신만의 개성을 살린 작품을 완성시키기 위해 오랜 세월 동안 도전하고 실험하는 가운데 희망과 절망의 교차점에서 줄타기를 하기도 했다.

서울 영동포구 영등포동 롯데백화점 롯데갤러리에서 9월 17일 개막한 그의 개인전은 작가로서의 숱한 고뇌와 열정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어느덧 24번째 개인전이다. 유하완 작가는 “그동안 고되고 오랜 작업을 벗어나기를 고대했지만 결국 나와 테이프 사이의 갈등은 칼로 물 베기 같은 사랑싸움이었다”고 고백한다.

이유 없이 큐브에 끌리고 익숙한 테이프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바느질하던 어머니를 보고 자란 기억 때문이다. 므두셀라 증후군이라는 게 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므두셀라라는 인물에서 유래했다. 므두셀라는 969세까지 살았다는 최장수 인물로, 나이가 들수록 과거를 회상하고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성향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추억을 아름다운 것으로 포장하며 나쁜 기억은 지우고 좋은 기억만 남겨두려 하는 심리다. 작가는 자신에게 질문한다. “므두셀라 증후군을 핑계로 아름답게 치장하여 나를 붙잡기 때문일까? 인간의 기억이 언제나 아름답게 남는 것은 필연인 것일까? 언뜻언뜻 떠오르는 기억의 조각이 아름다웠던 과거로 다가와 섬광처럼 사라진다.”

손으로 시간을 잡을 수는 없다. 도시의 메마른 빌딩 숲에서 지난날 소풍 가던 녹음 우거진 숲을 그리워하는 것은 지나가버린 어린아이의 호기심과 천진함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고층 건물 사이에서 한 땀 한 땀 숲을 그리다보면 잎사귀 사이에서 어린 날의 자신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크게 두 가지 작품이 출품됐다. 풍경(Landscape)과 회상(Flashback)이다. 작가의 작업은 많은 손질을 필요로 한다. 캔버스 위를 가로지르는 테이프가 만드는 오선지에 칼날이 그림을 그린다. 그 위에 얹은 물감이 스며들면 다시 테이프를 붙이고 자른다. 이 과정을 5~8회 반복한 끝에 테이프를 모두 떼어내면, 그 아래 의도와 우연이 빚어내는 우리네 삶의 모습이 드러난다.

누군가는 여기서 자연을 보고, 또 누군가는 여기서 도시를 볼 것이다.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른 것을 꿈꾸는 사람들. 서로에게 단절하고 스스로 고립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그런 의문에 사로잡힌 채 캔버스 위에 그린 천은 흘러가는 인생인지 피어나는 희망인지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도시 풍경의 테이프 작업 외에 3D큐브가 등장하는 작품도 눈길을 끈다.

3D큐브에 대해 작가는 “무심코 선을 잇다 보니 큐브를 연속한 것처럼 건물이 되었다가 동산이 되었다가 하는 조합을 보았다”고 설명한다. 큐브는 작가 자신의 내면에 잠재된 이미지요, 대상이라는 것이다. 1970~80년대 새마을운동이 붐을 이룰 때 즐비했던 빨간 벽돌집이 요즘은 재개발로 사라지고 있다. 유년기의 기억과 풍경을 되살리는 작업이다.

그의 작업이 이전에는 다분히 관념적이었다면 요즘 작품은 생활밀착형이다. 추상적인 붓질에서 대중적인 그림으로 나아가는 지점에 있는 것이다. 숲의 풍경은 천이나 커튼으로 환치됐다.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지켜주는 것을 나는 숲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들은 아이와 나,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서 사라져가는 그 풍경을 보호하는 또 하나의 장치”라고 한다.

“창 밖 천에 걸린 태양은 태풍 치는 밤이 지난 후 아이들이 보게 될 밝고 희망 찬 내일을 부를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이 오면 나는 내가 나온 요람으로 돌아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인생에 있어 순조로운 항해는 있을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하지만 누구나 마음속 소망이 있기에 오늘 하루를 힘차게 살아간다. 작가의 붓질도 예술도 그런 것이다. 10월 4일까지 전시(02-2670-8889).

이광형 문화전문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