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유책주의 유지 이유는?...쫓겨난 '조강지처' 위한 제도 충분치 않아

입력 2015-09-15 15:21 수정 2015-09-15 15:23
국민일보 자료사진

바람피운 배우자의 이혼 청구 소송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은 결혼생활을 깨뜨린 배우자가 낸 이혼 청구를 허용하는 건 현 한국사회에서 ‘시기상조’라고 봤다. 이혼 당할 배우자를 경제적으로 보호하는 규정이 미비한 상황에서 이런 청구를 받아들일 경우 여성 등 사회적 약자가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용덕 대법관)는 다른 여성과 혼외자를 낳은 남편 A씨가 아내 B씨를 상대로 낸 이혼 청구 소송을 15일 기각했다. A씨는 1976년 B씨와 결혼했는데 1998년 다른 여성과 혼외자를 낳았다. 2000년 집을 나와 이 여성과 동거하다 B씨를 상대로 이혼 소송을 냈다. 1·2심은 앞서 기존 대법원 판례에 따라 A씨의 청구를 기각했다. 대법원은 이 사건을 전원합의체에서 심리해왔다.

대법원의 판결은 우리 법원의 기존 입장이었던 유책주의 판례를 유지한 것이다. 이날 판결은 선고 결과에 따라 우리나라 이혼 판례가 유책주의에서 파탄주의로 전환될 수 있어 많은 관심을 모았다.

우리 법원은 결혼생활을 깨뜨린 책임이 있는 배우자의 이혼 소송은 받아들이지 않는 유책주의를 유지해왔다. 다만 상대 배우자가 결혼 생활을 계속할 의사가 없는데도 악의적으로 이혼을 거부할 때만 예외적으로 이혼을 받아들여줬다. 반면 파탄주의는 사실상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무의미한 상황인 경우 이혼청구를 받아들여주는 것이다. 파탄주의를 채택하는 게 세계적인 추세인 상황이라 이번 전원합의체 판결이 주목을 받았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그러나 현 한국사회에서 파탄주의를 도입해야 할 필연적 이유가 없다고 봤다. 잘못을 저지른 배우자도 협의 이혼을 통해 이혼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또 파탄주의를 채택한 나라에서는 상대 배우자의 희생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이에 대한 규정이 없다고 지적했다.

헌법재판소가 간통죄를 폐지한 상황에서 파탄주의를 인정할 경우, 바람피운 남편이 아내를 내쫓는 이른바 ‘축출이혼’이 발생할 위험도 적지 않다고 판단했다. 즉, 쫓겨난 ‘조강지처’를 보호할 만한 법적 제도가 충분히 마련돼 있지 않다는 취지의 판단이다. 재판부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증가했다고 하지만 취업, 임금, 자녀양육 등 모든 부분에서 만족할 정도는 아니다”며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현 단계에서 파탄주의를 받아들이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나성원 기자 na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