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온의 영화이야기] 37. 할리우드의 ‘제국주의 찬가’

입력 2015-09-14 13:47
일전에 SF영화 ‘주피터 어센딩’을 보면서 에롤 플린과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가 나왔던 1930~40년대 해양활극이 연상되더라는 평을 했다. 그런데 그와 유사한 느낌을 또 받았다. 이번에는 롤랜드 조페 감독의 판타지 액션 로맨스 ‘더 러버스(The Lovers 일명 싱귤래러티, 2015)’를 보고서였다. 조쉬 하트넷이 현대의 젊은이와 18세기 영국령 인도에서 활약하는 영국군 장교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1인 2역을 한 이 영화는 인도에서 벌어지는 활극이 주였다. 그러다보니 붉은색 영국군 제복을 입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하트넷의 모습이 어쩌면 그리 친숙한지 마치 그 옛날 역시 붉은색 영국군복을 입고 멋진 자태를 뽐냈던 ‘기적(1959)’의 로저 무어,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서는 1930~40년대 영화들을 통해 인도와 아프리카 등지의 식민지에서 영국군으로 ‘대영제국의 위세’를 떨친 에롤 플린이나 케리 그랜트, 게리 쿠퍼를 고스란히 연상시켰다.

영화 자체로 따지면 같은 감독이 만든 ‘미션(1986)’ 같은 명작과는 비교할 바 못되지만 킬링타임용으로는 그저 무난했다. 특기할 것은 이 영화가 본질적으로 1930년대에 쏟아져 나온 이른바 ‘대영제국 영화’ 또는 ‘제국 서사극’과 대단히 흡사하지만 그러면서도 시대적 변화를 반영해 옛날 영화들처럼 노골적으로 식민지 ‘야만인’들을 무시하지 않고 대신 식민지인들의 처지를 그나마 존중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그래도 이 영화를 보면서 생각나는 것은 20세기 전반기까지 할리우드를 잠식했던 ‘제국주의적’ 시각이다. 이런 풍조의 시작은 1935년작 ‘어느 벵골 창기병의 생애(Lives of a Bengal Lancer)'부터 라고 할 수 있다. 헨리 해서웨이가 감독하고 게리 쿠퍼가 주연한 이 파라마운트사의 영화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식민지 인도를 배경으로 용감한 영국군 장병들이 인도인들의 반란에 직면해 거점을 훌륭히 지켜낸다는 이야기를 다뤘다. 영화는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당시 권력의 정점을 향해 발돋움하던 아돌프 히틀러도 이 영화에 반해서 극찬을 늘어놓았다. “나는 이 영화를 세 번이나 봤다.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게 한줌밖에 안 되는 영국인들이 한 대륙을 평정하는 얘기 아닌가. 그것이야말로 우수한 인종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친위대(SS) 대원들은 반드시 이 영화를 봐야 한다.”

이 영화가 큰 성공을 거두자 할리우드는 유사한 영화를 쏟아냈다. 장르라는 이름까지 붙일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조류를 이룬 것은 사실이다. 바로 앞서 말한 ‘대영제국 영화’ ‘제국 서사극’이다. 그중에는 마이클 커티즈가 에롤 플린과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콤비를 기용해 만든 ‘경기병대의 돌격(Charge of the Light Brigade, 1936)’ 헝가리 출신의 졸탄 코다 감독이 만든 ‘대영제국: 강의 샌더스(The British Empire: Sanders of the River, 1936)와 ’드럼스(Drums, 1938)와 ‘4개의 깃털(Four Feathers, 1939)’ 등 이른바 ‘제국 3부작(Empire Trilogy)’, 그리고 명장 조지 스티븐스의 초기작인 케리 그랜트 주연의 ‘강가딘(Gunga Din,1939)’과 윌리엄 웰먼 감독, 게리 쿠퍼, 레이 밀랜드 주연의 ‘보 제스트(Beau Geste, 1939)'가 유명하다.

이 영화들은 대개 영국의 인도나 아프리카 식민지를 배경으로 주로 식민지 반란을 제압하는 영국군 장병들의 모험을 그리고 있다. 그러면서 영국의 최전성기인 ‘빅토리아 시대의 질서’ 혹은 ‘문명화된 질서’가 군사적 기치로 전환돼 ‘식민지의 야만과 혼란’을 무력으로 정리한다는 ‘제국주의 찬가’를 불러댄다. 한 가지 첨언하자면 ‘보 제스트’의 경우 영국군이 아니라 아프리카 주둔 프랑스 외인부대를 다뤘으며, ‘경기병대의 돌격’은 인도 식민지의 반란에서 시작된 영화의 갈등이 반란세력의 배후조종자인 다른 강대국(여기서는 러시아)과의 충돌로 확대돼 크림전쟁을 무대로 한다.



이런 ‘제국주의적 영화’들은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1950년대의 ‘킴(Kim, 1950, 빅터 새빌 감독, 에롤 플린 주연)’과 ‘카이버 소총부대의 킹 대위(King of Khyber Rifles, 1953, 헨리 킹 감독, 타이론 파워 주연)’를 비롯한 일련의 ‘카이버 고개(현재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잇는 고개)'배경 영화들을 필두로 60년대에는 중국의 의화단 사건을 다룬 ‘북경의 55일(55 Days at Peking, 1963, 니콜라스 레이 감독, 찰턴 헤스턴, 데이비드 니븐 주연)’, 남아프리카 줄루족의 반란을 그린 ‘줄루(Zulu, 1964, 사이 엔필드 감독, 스탠리 베이커, 마이클 케인 주연)’, 그리고 ‘하르툼(Khartoum, 1966, 이 이름은 아프리카 수단의 수도로서 국내 개봉 당시에는 어찌 된 셈인지 ‘카쓰므'라는 발음도 잘 안 되는 희한한 표기가 붙었다)’으로 이어졌고 70년대까지도 그 흐름은 계속됐다.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을 배경으로 영국군 병사 두 명의 모험담을 그린 ‘왕이 될 뻔한 사나이(Man who Would Be King, 1975, 존 휴스턴 감독, 숀 코너리, 마이클 케인 주연)’가 그 예.

특기할 것은 ‘하르툼’이다. ‘마흐디의 반란’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베이실 디어든이 연출한 이 영화에서 놀랍게도 정통파 셰익스피어 배우 로렌스 올리비에가 얼굴을 검게 칠하고 아랍 이슬람 반란군 지도자 마흐디(무함마드 아흐마드), 찰턴 헤스턴이 마흐디의 반란을 저지할 목적으로 수단에 파견된 영국의 찰스 고든 장군역을 맡았는데 ‘문명화된 질서’가 ‘야만적인 광신’에 승리를 거두는 일반적인 할리우드 공식을 깨고 영국군이 패배한다. 그래서 결국 하르툼이 반란군의 수중에 떨어지고 고든 장군은 참수돼 머리가 창끝에 꽂혀 쳐들리는 처참한 모습을 보여준다. 식민지가 제국군을 이기는 것이지만 물론 그렇다고 제국주의가 종언을 고하는 것은 아니다. 제국주의적 시각은 그 후로도 할리우드에 끈질기게 살아남아 심지어 ‘스타워즈’ 시리즈 와 ‘주피터 어센딩’ 같은 미래 SF에까지 담기고 있는 것이다.

김상온(프리랜서·영화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