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이범수 “내가 한 일들은 후회되지 않는다. 하지만…”...kmib가 만난 스타

입력 2015-09-13 00:00
드라마하우스&에이스토리 제공
드라마하우스&에이스토리 제공
(인터뷰①) 코미디면 코미디, 멜로면 멜로, 액션이면 액션… 국내에서 배우 이범수만큼 연기 스펙트럼이 다양한 배우도 없을 겁니다. 언제나 안광이 형형히 빛나는 커다란 눈과 굳게 다문 입술만 보자면 그토록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해낸 배우라는 것이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그에게는 남자 냄새 물씬 풍기는 선 굵은 역할이 제일 잘 맞는 옷처럼 보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1990년 데뷔한 이래로 25년간 빈틈 없이 꼭꼭 채워 온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다채로운 역할들이 넘쳐납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배역 소화력 때문에 작품의 스토리보다 캐릭터가 더 빛난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 그가 강형규 작가의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한 JTBC 금토드라마 ‘라스트’의 악역, 곽흥삼으로 변신했습니다. 국민일보가 이범수와 만나 ‘라스트’, 그리고 곽흥삼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최근 캐스팅 단계에서부터 난항을 겪은 ‘치즈인더트랩’이 그랬듯, 원작이 있는 작품들은 부담이 큽니다. 이범수에게도 ‘라스트’ 출연은 도전이었을 듯했습니다. 그러나 25년차 베테랑 배우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웹툰 ‘라스트’를 단 한 페이지도 보지 않았다고 하네요.

“원작을 전혀 안 봤어요. 그래서 내용을 모르고 시작했죠. 드라마가 끝나면 보려고 했어요. 심지어 주변에서 촬영 중간에 선물까지 해 줬는데도 읽지 않았습니다. 제가 읽는 설계도는 오로지 방송 대본이기 때문에, 일관된 설계도만 보고 가고 싶었어요. 영화고 드라마고, 대본이 설계도라고 생각합니다.”

원작을 접한 적 없는 그가 곽흥삼을 만들어낸 방법이 궁금해졌습니다. ‘외과의사 봉달희’나 ‘오! 브라더스’ 때는 병원이며 유치원을 방문해 관찰하고 체험하는 등 물리적인 노력을 했지만, 곽흥삼의 경우는 좀 달랐다네요.

“일단 출연 제안을 받고 대본을 읽은 후 극의 긴장감을 이끄는 곽흥삼이라는 인물에 매력을 느꼈어요. 캐릭터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죠. 온전히 상상력을 통해서 만들어낸 인물입니다. 노숙자 역할이 아니니까 서울역에 가본 적도 없죠.”

이범수는 ‘라스트’에서 클럽이나 바에서 찍었던 장면들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고 밝혔습니다. 자신이 연기력을 펼칠 기회가 가장 많은 공간이었기 때문이죠.

“곽흥삼이 상대를 떠 보든, 겁을 주든, 아는데 모르는 척을 하든, 그런 장면들은 다 흥미로웠어요. 또 액션 장면이 기억에 남는데요. 처음 ‘라스트’를 할 때 남성분들이 많이 좋아하실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액션 드라마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니까요. 거친 남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액션을 참 잘 찍고 싶었는데 나름대로 노력한 만큼 반응이 좋아서 감사했죠.”

특히 총 59분의 방송 분량 중 9분간 쉬지 않고 몰아친 7화의 액션 장면은 크게 화제가 됐습니다. 거친 액션이 많았는데, 힘든 점이나 가족의 걱정은 없었는지 물었습니다.

“다행히 다치진 않았는데, 액션 장면을 찍을 때 개인적으로 걱정되는 부분이 있어요. 그냥 일상 생활에서 계단을 뛰어 내려가다가도 접질리고, 인대가 늘어나고 하잖아요. 수많은 사람이 단체로 액션을 할 때는 어떻겠어요. 상대가 실수를 하든, 내가 하든 위험하죠. 사실 다치는 건 괜찮아요. 죽는 것 아니니까. 그런데 불편함이 따르니까 문제죠. 불편함으로 연기를 해야 하는 것, 나을 때까지 연기에 지장을 주는 것이 안타까워요. 연기력을 십분 발휘할 수 없으니까.”

윤계상을 비롯해 박예진, 박원상, 서예지 등 함께 출연한 배우들과의 호흡도 무척 좋았다고 전했는데요. 박원상은 무척 점잖고 에너지 넘치는 좋은 배우, 박예진은 열연이 인상적인 배우라고 소개했습니다. 특히 윤계상에 대해 질문했을 때는 “괜찮은 애, 두고두고 보고 싶은 친구”라고 즉답이 나왔습니다. 출연진 모두가 각자 주어진 역할을 멋지게 표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화기애애한 촬영장 분위기가 짐작되는 대목입니다.

“감독님 비롯해서 촬영 파트별 모든 스태프들이 호인이셨어요. 배우들로선 연기만 잘 하면 되니 편안하게 촬영할 수 있죠. ‘라스트’ 팀 그대로 다른 작품에서 만나고 싶어요. 대본의 힘도 큰 것 같습니다. ‘자이언트’와 ‘샐러리맨 초한지’ 때도 늘 1,2회 정도 미리 대본을 주시는 장경철 작가님 덕에 똑같은 팀으로 두 번 작업을 할 수 있었죠. ‘라스트’도 그랬어요. 또 보고 싶은, 만나면 반가운 팀원들입니다.”

이범수는 쪽대본, 늦은 대본과 같은 드라마 제작 환경 문제에 대해서도 발언했습니다. 드라마는 공동 작업인데 방송 하루 이틀 전에 대본이 나오면 아무래도 힘이 든다네요. 대사를 외우는 것에만 급급해 표현에 신경쓰지 못하는 것도 안타까워 했습니다. 창작의 고통은 이해하지만 현장에서 제2의 창작을 해야 하는 배우 및 연출진들의 힘듦도 알아달라는 것이었죠. 다행히 ‘라스트’는 그렇지 않았지만, 선후배들을 위해서 목소리를 낸 듯했습니다.

영화를 방불케 하는 드라마 퀄리티에 비해 ‘라스트’의 시청률은 다소 아쉬웠습니다. 그러나 화제성은 남달랐죠. 인터넷 상에서는 ‘라스트’를 한 번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는 평가까지 있었습니다.

“시청률, 아쉽죠. 아쉬운데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어요. 시청률 집계 시스템이 개선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안방 극장으로 드라마를 접하지 않는 젊은 분들이 다양한 형태로 ‘라스트’를 많이 봐 주셨는데, 그런 부분도 카운트돼야 한다고 봐요. 그런데 놀랐던 것은, 제가 사는 아파트 단지 엘리베이터나 식당, 카페 등 일상 생활에서 젊은 친구들이 저를 보고 ‘곽흥삼이다!’하고 알아봐 주셨던 점이었어요. 드라마 시청률이 잘 나왔을 때 받는 반응이었거든요. 이를테면 ‘온에어’, ‘자이언트’, ‘샐러리맨 초한지’, ‘외과의사 봉달희’를 할 때처럼 길을 지나다닐 때 배역으로 불리는 거죠. 오늘도 헤어샵을 가기 위해 차에서 내려 걸어가는데 대학생으로 보이는 분들이 곽흥삼을 알아봐주셔서 놀랐어요. 그런 반응들이 기분 좋네요.”

두 딸도 이 드라마를 봤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범수는 “애들이 드라마 속 내 모습을 따라한다”고 너털웃음을 지었죠.

“오늘 있었던 일인데, 아내가 그러더라고요. 첫째가 다른 사람한테 무섭게 얘기를 하더라는 거에요. 제가 드라마에서 하는 것처럼요. 그래서 제가 ‘무섭게 얘기하는 거 어디서 배웠어? 엄마가 그랬어, 아빠가 그랬어?’라고 물으니까 ‘TV에서 봤다’고 말하더라고요. 그런 것들을 여과 없이 받아들일 나이잖아요? 제가 아침에 유치원 가기 전에 ‘TV는 다 가짜야. 너 아빠가 평소에 그러는 거 봤어? 일부러 재미있게 하려고 가짜로 그렇게 하는 거야. TV 따라하면 안돼~’라고 말했죠.” 드라마에서는 지하세계의 1인자인 이범수도 집에서는 상냥한 아빠인 모양입니다.

마지막으로 12일 종영한 ‘라스트’의 최고 명대사를 꼽아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내가 한 일들은 후회되지 않는다. 내가 앞으로 하지 못한 일들이 후회되는 거지. 지극히 곽흥삼다운 말이에요.”

그가 보여준 곽흥삼다운 이범수, 이범수다운 곽흥삼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라효진 기자 surplu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