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와 싸워 이겼습니다. 이제 우리 정부가 성의를 보일 차례입니다.”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성낙구(71) 한국원폭피해자협회장은 감격한 듯 고개를 숙였다. 일본 최고재판소가 한국인 원폭 피해자에게 일본인과 똑같이 의료비 전액을 지원하라고 판결한 직후였다. 전국 각지에서 상경한 90여명의 할머니 할아버지도 박수를 치며 환영했다. 모두 후유증을 안고 사는 피폭 1·2세대 피해자들이다.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던 1945년 8월 6일 성 회장은 두 살배기 젖먹이였다. 공습경보 속에 미처 방공호로 피하지 못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건너왔지만 원폭이 남긴 상처는 70년간 그를 쫓아다녔다. 치매에 시달린 어머니에 이어 성 회장도 평생 피부질환을 앓고 있다.
대한적십자사가 파악하고 있는 국내 거주 원폭피해자는 2535명이다. 대부분 70~90대 고령이며 평균 나이는 82.5세다. 피부병과 암 등 각종 질병을 달고 산다. 평생을 병과 씨름하다 매년 200여명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
일본 정부는 2003년부터 이들에게 매달 원호수당(재해수당)과 연간 의료비, 연 1회 건강검진을 제공해왔다. 원호수당은 건강관리수당(3만4030엔) 보건수당(1만7070엔) 의료특별수당(13만8380엔) 특별수당(5만1100엔)으로 나뉜다.
그러나 일본 후생노동성이 원폭에 의한 질병이라고 인정하거나 원폭 중심지로부터 2㎞ 이내에서 직접 피폭된 경우에만 지급하는 등 조건이 까다롭다. 일본 정부가 발행하는 피폭자 건강수첩이 없는 피해자 86명은 지원 대상에서 제외돼 있다. 성 회장은 “매달 건강관리수당 30여만원만 받고 있는 회원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일본 정부는 국내 원폭 피해자들에게 연간 30만엔(300여만원)의 의료비 지원을 별도로 하고 있지만 턱없이 모자란 형편이다. 만성신부전증을 앓고 있는 원폭 피해자 이홍현(69)씨는 “1주일에 2, 3번씩 병원에 가서 치료받는데 한 달 병원비가 200만원을 훌쩍 넘는다”며 “아픈 몸으로 일도 못하고 식구들에게 폐만 끼치는 상황”이라고 했다. 성 회장은 “암을 포함한 합병증까지 겹치면 연간 치료비가 2000만원 넘게 든다”고 말했다. 원폭 피해자 가운데 20%가량은 기초생활수급자다. 이들에게 치료비는 엄청난 부담일 수밖에 없다.
이번 판결로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원폭 피해자도 의료비 전액을 일본 정부에서 받을 수 있게 됐다. 적십자 관계자는 “일본 후생노동성이 판결 내용을 검토해 통보하는 대로 세부절차 마련에 착수할 것”이라며 “한국 병원 영수증의 번역과 일본 측에서 정하는 수가 문제 등이 아직 남아 있다”고 했다.
원폭 피해자들은 일본이 책임을 인정한 만큼 한국 정부도 피해자 지원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적십자는 현재 원폭 피해자 의료비 중 급여 부분 본인부담금과 매달 10만원의 진료보조비를 지급하고 있다. 그나마 1세대만 해당된다. 2세대 피해자에겐 지원 자체가 없다.
성 회장은 “현재 받고 있는 지원은 피해자들이 직접 일본 정부를 상대로 뛰어서 얻어낸 것”이라며 “이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책임을 다하지 않았고 1300여명의 2세대 환우들은 방치되고 있다”고 했다. 한국인 원폭 피해자 지원 특별법안은 17·18대 국회에서 폐기됐다. 이후 3년째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박세환 김판 기자 foryou@kmib.co.kr
"원폭 피해자에 우리 정부도 성의 보여야"
입력 2015-09-08 1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