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예술극장 개관 페스티벌 스케치 "흥미롭지만 어렵다"

입력 2015-09-06 20:55
광주 아시아예술극장 개관 페스티벌 개막작 ‘당나라 승려’(위 사진)에서 배우 리강생이 흰 종이 위에 누워 있고 목탄 드로잉 아티스트 카오준혼이 거미를 그리고 있다. 대만 출신 영화감독 차이밍량이 연출한 이 작품은 속도를 중시하는 현대사회를 지적하며 동양 특유의 ‘느림’을 강조한다. 태국 군부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열병의 방’과 말레이시아 역사의 주요 순간을 보여주는 마크 테의 ‘발링회담’(맨 아래 사진)은 관객에게 우리가 속한 아시아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아시아예술극장 제공

거대한 흰 종이 위에서 한 남자가 자고 있다.

지난 4일 광주 아시아예술극장 개관 페스티벌 개막작 ‘당나라 승려’를 보기 위해 대극장(극장1)에 들어선 관객들이 맞닥뜨린 장면이다. 가로 8m, 세로 4m 종이 위에 누워 있는 이는 당나라 시대 승려 현장 역을 맡은 대만 배우 리강생이다.

우리나라에도 삼장법사로 잘 알려진 현장은 혈혈단신으로 고비사막을 횡단하는 등 중국에서 인도까지 걸어서 경전을 가져온 인물이다. 19년 걸린 구법 여행은 중국 고전 ‘서유기’에서 흥미진진한 모험으로 묘사돼 있지만 실상은 절대적인 고독과 죽음 같은 두려움으로 점철돼 있었다. 대만 출신의 유명 영화감독 차이밍량(57)이 연출한 ‘당나라 승려’는 대사 없는 연극 또는 퍼포먼스다. 아시아예술극장이 오스트리아 빈 페스티벌, 벨기에 쿤스텐 페스티벌, 대만 아트 페스티벌과 공동 제작했다.

리강생이 잠을 자는 1시간 동안 목탄 드로잉 전문 아티스트인 대만의 카오준혼이 검은 목탄으로 흰 종이 곳곳에 20여 마리의 거미들을 그려나간다. 몇몇 거미는 그렸다 지우기도 한다. 흰 종이 전체를 검게 칠하더니 그 위에 다시 나무와 꽃을 그린다. 현장의 꿈 속 풍경으로 거미는 두려움과 불안을 상징한다. 나무와 꽃은 복잡한 마음을 겨우 진정시킨 그의 내면을 의미한다. 잠에서 깨어난 현장은 천천히 차를 마시고 복숭아를 먹었다. 머리 면도 후 검게 칠해진 종이 위를 느린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고독한 여행길을 묘사한 것이다. 2시간 20분 간 진행된 이 공연은 일종의 ‘묵언수행’이었다. 차이밍량이 2012년부터 ‘느림’을 소재로 만들고 있는 ‘걷는 사람’ 연작의 일환이다. 속도에 목숨 거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빠른 속도에 익숙해져 있는 관객들은 공연 내내 괴로워했다. 개막작이라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국내·외 언론, 문화체육관광부 및 광주시 관계자들이 객석(200석)의 대부분을 채웠음에도 20여명이 중간에 뛰쳐나갔다. 지난해 빈 페스티벌 초연 당시에도 많은 관객이 중간에 나갔었다.

그나마 광주에선 대극장의 개·폐형 유리벽을 열어 극장 안과 바깥을 연결한 덕분에 관객들은 공연 도중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힘든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원래 개·폐형 유리벽은 빛과 소음에 취약하다는 지적을 받았는데, 이날만큼은 관객을 덜 지치게 만든 셈이다. 상당수 관객은 공연 도중 슬쩍슬쩍 휴대전화를 꺼내 보거나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외에 개관 페스티벌 이틀간 펼쳐진 아피찻퐁 위라세타쿤(태국)의 ‘열병의 방’, 마크 테(말레이시아) ‘발링회담’, 사카구치 교헤(일본) ‘제로 리;퍼블릭’, 로메오 카스텔루치 ‘봄의 제전’, 리카르도 바르티스(아르헨티나)의 ‘바보기계’ 등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태국 군부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열병의 방’이나, 20세기 중반 말레이시아 건국을 둘러싼 ‘발링회담’은 서양 정치와 역사는 잘 알면서도 막상 같은 아시아 국가들의 상황에 무지한 한국 관객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줬다.

문제는 작품들이 실험적이다 보니 일반 관객에겐 어렵다는 점이다. 문화예술계 사람들은 재미가 없어도 의미를 찾으며 관람할 수 있지만, 예술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 관객은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실제로 대부분 작품에서 관객들이 중간에 나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김성희 예술감독은 5일 “동시대 예술은 고정관념을 흔들기 때문에 낯설고 불편하다”면서 “아시아예술극장이 추구하는 정체성은 예술가들이 던지는 질문을 관객과 함께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21일까지 계속되는 개관 페스티벌에는 해외 언론과 문화예술계 관계자들도 대거 찾았다. 이들은 극장 방향성과 프로그램에 흥미와 공감을 드러냈다. 독일 유명극장 폭스뷔네의 차기 프로그램 디렉터 마리에타 피켄브록은 “아시아예술극장 프로그램이 그간 아시아에서 없었던 시도여서 폭스뷔네를 비롯해 유럽 극장과 페스티벌들이 큰 관심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높은 수준의 현대예술을 계속 선보이는 동시에 관객을 위한 대중적인 작품도 무대에 올리며 그 차이를 좁혀가야 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광주=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