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위에서부터 순서대로)
- 북한산 정향나무에 맺힌 씨앗 / 비봉 인근 등산로 / 삼천리골 탐방로의 야생화(순서대로 박주가리, 사위질빵, 붉나무 꽃, 꽃며느리밥풀, 닭의장풀) / 삼천리골 계곡의 도마뱀과 개구리 / 삼천리골 초입 탐방로 정비 공사 현장(좌·우) / 절충점을 찾아 정비된 송추계곡 입구 / 송추계곡에서 더위를 식히는 피서객들 / 송추계곡 들머리의 과거(왼쪽 사진)와 현재 모습 / 구성찬 기자
거의 매주말마다 운동을 겸해 북한산을 오른 지 30년 가까이 된다. 어느 코스로 갈 것인지를 고민할 때도 있지만, 대개 수년 단위로 정하는 3~4개 탐방로와 그 변형코스를 따른다. 나무와 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후 달력에 맞춰 가서 꼭 보고자 하는 ‘계절의 상징’들을 마음속에 품게 됐다. 예를 들면 3월 중순 끝 무렵에는 알싸한 생강나무 꽃향기를 맡으러 연화사 뒤편, 3말4초에는 귀룽나무 새 잎과 진달래꽃이 좋은 곳, 4월말에는 층층나무 꽃이 핀 구기터널 입구의 불광동 쪽 계곡을 찾는다. 4월 중·하순 산벚나무와 귀룽나무의 낙화, 그리고 계곡물을 뒤덮는 꽃잎을 볼 수 있는 명소도 있다.
◇ 나무의 숨결에 배인 사람의 숨결
지난 17일 은평구 서북쪽 끝자락인 진관외동 삼천리골 탐방로를 찾았다. 이곳은 교통편이 좋지 않아서 비교적 한적한데다 철마다 볼거리도 적지 않다. 계곡 초입에는 고목 수준의 상수리나무가 많다. 품질 좋은 도토리를 많이 생산했고, 임금에게 진상까지 했다고 한다. 삼천사 계곡은 응봉능선과 의상능선 사이에 있는 물길이다. 지금은 건천이어서 비가 많이 온 뒤에나 계곡답지만, 예전에는 약수 나오는 곳이 많았다.
20분쯤 걸으면 조그만 폭포가 나오고 거기에서 왼쪽의 대남문으로 가는 길과 오른쪽 비봉으로 가는 길로 나뉜다. 대남문 오르는 길의 계곡이 시작되는 곳은 10월말쯤 단풍이 일품이다. 4월말에는 벚꽃 잎이 계곡 물을 연분홍빛으로 수놓기도 한다. 그렇지만 절정이 일주일도 채 지속되지 않는 절기의 풍광에 방문시기를 맞춘다는 게 쉽지는 않다. 매주말 가더라도 운이 나빠 때를 놓치면 가는 곳이 있다. 향로봉 턱밑의 포금정사터에서는 5월 초순에도 꽃을 자랑하는 산벚나무 고목 한 그루와 귀룽나무 고목 10여 그루를 볼 수 있다.
오래 된 숲을 걸을 때 100년 전, 200년 전 그곳을 자주 다니던 사람들의 호흡과 체취를 경험할 수 있다. 전영우 국민대 교수는 조선시대 임금 정조(正祖)의 효심이 녹아 있는 용주사(경기도 화성) 대웅보전 앞의 고사한 회양목을 두고 “부모님의 은혜를 기리고, 부모님의 체취를 느끼고자 원하면, 생전에 부모님들이 자주 찾았던 절집을 찾아보라고”고 권한다. “절집의 노거수는 부모님이 내 뱉던 날숨 속에 들어 있던 이산화탄소로 제 몸통을 키웠기에, 그 나무가 내뿜는 산소를 오늘의 우리들이 들숨으로 마시면, 바로 내 몸의 일부에 부모님의 체취를 다시 담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수령 1100년가량의 용문사의 은행나무가 이르게는 원효대사, 늦게는 마의태자의 숨결을 화석처럼 간직하고 있듯이 고목들은 숱한 세대를 연결한다. 북한산 고목에도 200여 년 전의 호랑이와 이를 향해 활을 쏘던 정조의 숨결이 서려 있을 것이다.
◇ 북한산 정향나무에 드리운 어두운 그늘
오른쪽 비봉으로 가는 길을 택한다. 봄에 노란제비꽃이 많고, 철쭉도 간간이 볼 수 있는 탐방로다. 북한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루트였던 이 길이 1995년 재개방됐을 때에는 온갖 양치식물과 이끼들로 뒤덮여 맨땅을 보기 어려웠다. 여름에 뱀이 지나가기도 하고, 겨울에는 까투리가 새끼들을 일렬로 거느리고 산비탈을 오르는 것도 봤다. 비봉능선의 남쪽 탐방로들이 땡볕에 노출돼 있는 반면 이곳 탐방로는 지금도 대체로 그늘이 이어진다. 그렇게 약 40~50분 걸으면 비봉능선의 안부에 닿는다.
비봉능선을 따라 정향나무가 10여 그루 산재해 있다. 정향나무는 조선시대까지 우리나라에 흔했던 물푸레과 수수꽃다리속의 관목으로 향기가 좋아서 여인들의 향수, 약재 등으로 쓰임새가 많았다. 같은 수수꽃다리속의 종으로 미국인에 의해 ‘미스킴 라일락’으로 둔갑한 털개회나무와 사촌뻘 되는 나무다. 요즘 학자들은 털개회나무를 정향나무와 동종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일부 개체는 공단에서 CC-TV를 설치해 모니터링하고 있다. 백두대간을 능선 길을 따라 산재해 있던 정향나무, 꽃개회나무 등은 개체수가 차츰 줄어들고 있다. 햇빛을 많이 받을 수 있는 등산로 주변에 주로 분포하므로 사람의 답압에 취약하다.
매년 정향나무 꽃이 필 때쯤 유심히 살펴봤지만, 지난 6월 탐방로 바로 옆의 작은 개체들이 꽃을 피운 것은 올해 처음 봤다. 화사한 모습과 진한 향기는 탐방객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늘질 때가 많은 곳인데다 탐방객의 손을 타기 쉬운 곳이라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이번에 보니 씨앗의 결실상태가 역시 좋지 않았다. 주변에 키가 더 큰 팥배나무, 소나무, 산벚나무 등에 가려서 햇볕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1983년 북한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무렵에는 정향나무가 승가봉, 문수봉까지 꽤 많았다고 한다. 송추분소 관계자에 따르면 도봉산과 사패산에도 예전에는 정향나무가 많았지만, 지금은 오봉에 5그루 정도만 남았다. 햇빛을 좋아하지만, 다른 나무들과의 햇볕 경쟁에서 곧잘 밀려나는 정향나무가 북한산에서 사라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데 생각이 미치니 우울해진다. 어디 북한산뿐인가. 백두대간을 능선 길을 따라 산재해 있던 정향나무는 소백산 등에서 거의 사라졌다. 개체가 가장 많은 설악산에서도 계획대로 케이블카가 건설되면 서북능선의 꽃개회나무, 정향나무들이 백척간두의 위험에 처할 것이다. 케이블카 탑승객들은 등산객들과 또 다르다. 그들은 개화시기에는 탐방데크에서 빠져나와 사진을 찍거나 심지어 꽃을 꺾기도 할 것이다.
◇ 놀이터로 전락한 도심의 국립공원
비봉능성 사모바위 부근 공터는 대동문일대와 함께 북한산의 ‘어른 놀이터’가 돼 버렸다. 그 장소들은 개활지가 넓어서 특히 봄, 가을 주말에는 단체 탐방객들의 술판이 빼곡히 들어찬다. 걸어서 지나가려면 이리저리 피하면서 발 디딜 틈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나 북한산의 유원지화는 환경부와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자초하는 측면이 크다. 우선 입장료 폐지 결정이 그렇다. 북한산국립공원 입장객은 연간 약 800만 명에서 2007년 입장료 폐지 후 1000만 명으로 늘었다. 탐방문화도 나빠졌다. 수십, 수백 명이 참가하는 동창회, 향우회, 기업 단합대회까지 북한산 꼭대기에서 하는 실정이다. 입장료를 받았을 때에는 인원수가 많으면 목돈이 나가기 때문에 꿈도 못 꾸던 일이다. 북한산에는 샛길이 338개 구간에 길이가 205㎞나 된다. 이에 따라 해가 갈수록 생태계의 파편화, 식생의 단조로움, 계곡 물의 고갈 등이 심화되고 있다.
지금 삼천리골 초입에서 벌이고 있는 탐방로 정비 공사도 탐방객에 대한 과잉친절이다. 전혀 위험하지도, 경사도가 힘들지도 않은 탐방로에 울타리와 데크, 잔돌을 설치할 필요가 없다. 이상배 북한산국립공원 관리소장은 “탐방객들의 민원이 있어서”라고 말했다. 그러나 슬리퍼 신고 오는 탐방객의 요구에까지 부응하는 것은 국립공원의 취지에 대한 몰이해가 아닐 수 없다.
사모바위 옆에 조성된 ‘김신조 루트’ 안보현장 견학시설은 또 어떤가. 공단은 2011년 무장공비 밀랍인형을 무장공비 은신처인 바위 속에 배치하고 탐방데크를 설치해 놓았다. 지금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이 시설이 국립공원 심장부에 있어야 하는지 공단 내부에서도 회의적이다. 게다가 산수유 등 이곳에 자생하지 않는 나무들까지 옮겨 심어 국립공원의 취지에 반하고 있다. 이 안보시설은 몇 년 전 국정감사에서 문제점이 지적됐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철거되지 않고 있다.
승가사 대신 포금정사터를 거쳐서 탕춘대 능선으로 갔다. 상명대와 홍은동, 녹번, 불광동 방향의 갈림길인 탕춘대 능선 암문에는 장미과 키 작은 나무인 산사나무 고목이 5그루가 있다. 비교적 늦게 화사한 흰 꽃을 피운다. 그런데 북한산 둘레길이기도 한 불광동 장미공원으로 향하는 길 주변에도 산사나무라는 명패를 붙인 나무들이 서 있다. 그러나 이 나무는 산사나무가 아니라 미국산사나무다. 잎이 여러 갈래로 갈라진 산사나무와 달리 미국산사나무는 잎이 둥글고, 가지에 긴 가시가 달려 있다. 국립공원 안이라면 전문가그룹이 있어서 이런 착오가 없었겠지만, 지자체가 관리하는 구역이라서 수준 차이가 드러난다.
◇ 끈기와 개념을 갖춘 보존과 이용의 조화
오후에 송추계곡으로 발길을 돌렸다. 송추계곡 초입에는 과거 유원지 시절 많은 음식점이자릿세를 받고 무질서한 불법영업을 해 왔다. 공단은 2011년부터 초입에서 탐방안내소까지 1.8㎞에 이르는 계곡 탐방로의 음식점들을 사들이고, 정비사업을 펼쳤다. 총 400억원을 들여 주민보상을 마쳤고, 총 53가구 중 30가구가 의정부 국도 변에 조성한 이주단지에 입주했다. 이주단지 맞은편에는 대형주차장이 마련됐고, 승용차를 타고 온 탐방객들은 여기서부터 걸어야 한다. 공단의 장석민 송추분소장은 “등산을 하는 탐방객이 적은 편이었던 이곳의 탐방객이 20% 늘었고 만족도도 높아졌다”고 말했다.
북한산 국립공원은 세계적으로 매우 드문 도심 자연공원이다. 연간 1000만 명이 넘는 등산객이 찾아서 단위 면적당 등산객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국립공원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그러니 이 국립공원은 이용목적이 보전기능을 압도하는 형편이다. 일부에서는 북한산을 국립공원에서 해제하고 관리권을 서울시에 넘기자는 극단론도 제기한다. 그러나 북한산은 그러기에는 너무 아까운 명산이다. 북한산국립공원은 규모는 비교적 작지만 산이 갖출 수 있는 모든 매력을 빠짐없이 갖춘 명산이다. 특히 곳곳의 암릉과 암벽등반 명소인 인수봉 등은 오직 설악산에만 규모에서 뒤질 뿐 남한에서 셋도 없는 자산이다. 그밖에도 곳곳의 역사유적과 계곡, 폭포, 단풍과 벚꽃의 명소들이 산재해 있다. 또한 산개나리, 미선나무, 삵, 수리부엉이, 오색딱다구리 등 많은 법정보호종들이 살고 있다.
국립공원관리공단 보전처의 오장근 박사는 “특별보호구역을 늘리고 보호기간도 20년 정도로 길게 설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국립공원 등급제를 시행하는 방안도 좋은 대안이다. 북한산, 계룡산, 치악산 등 도시 근교 국립공원은 이용과 탐방서비스 위주로 하되, 생태계 황폐화는 막기 위해 상당한 입장료를 물린다. 대신 설악산, 오대산, 지리산 등은 최소한 탐방로만 철저한 탐방예약제와 인원 제한을 통해 개방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장 등산애호가와 지방자치단체의 민원과 정치적 압력을 버텨내기 어려울 것이다.
승가사를 거쳐 구기동 계곡으로 내려오면서 생각한다. 승가사 뒤쪽 숲과 포금정사터의 산벚나무 고목들이 내 손자, 손녀들이 찾아 올 때에도 건재할까. 그들이 내 숨결과 체취를 느낄 수 있을까.
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 사진=구성찬 기자 ichthus@kmib.co.kr
[임항 논설위원의 ‘그 숲길 가보니’] 북한산 정향나무는 그 숨결을 얼마나 더 간직할 수 있을까
입력 2015-09-04 17:40 수정 2015-09-04 18:13